67. 다 이루었다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더 오래 살아남는 쪽이 하나님의 뜻일 거야.”

 열심당을 떠났던 친구 시몬이 했던 말. 그 말은 결국 누구의 승리로도 끝나지 않았다. 앞에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예수 역시 자신과 같은 꼴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시몬 녀석은 그가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열심당을 떠나면서까지 얻고 싶어 했던 그 꿈도 결국 이렇게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그가 차라리 자신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로마에 대항했더라면, 이런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열심당의 무력과 그의 능력, 그리고 백성들의 지지가 하나가 된다면 못 이룰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말이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께 받은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쫓고, 기적을 보인다 한들, 그의 마지막 역시 자신과 똑같은 십자가형이라면, 그 능력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도 보아라. 오히려 자신보다 더 비참한 몰골이지 않은가? 그는 얼마나 채찍질을 당했는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땅에 긴 핏자국을 남기며 걸어가고 있다. 십자가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해 비틀대고 있는 꼴이라니. 저 상태라면 중간에 쓰러질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이겠는가? 스스로를 주라 불렀던 그가 자기 십자가조차 제대로 지지 못한 것이니 말이다.

 남자의 생각대로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길을 얼마 오르지 않아 쓰러졌고, 병사들은 옆에 있던 한 남성을 강제로 끌고 나와, 십자가를 대신 지고 그 뒤를 따르도록 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때 조금이나마 예수님께 기대를 가졌기에,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대 이상의 희망까지도 가졌던 그이기에, 지금 눈앞에 보이는 실패자의 모습은 실망감을 넘어 분노까지 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을 격려하는 사람의 모습도, 예수님을 따라오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는 수많은 백성의 모습도 모두 짜증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로마에 항거할 힘을 가지고도,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자들. 그들에게 예수라는 자가 그렇게 소중하다면, 그가 죽는 것이 그렇게도 슬프다면, 일어나 대항을 하면 되지 않는가? 이래서 우리 민족이 안 되는 것이다. 로마에 협력하는 사두개인이나, 공존을 말하는 바리새인이나, 약해빠진 백성들이나 다 똑같은 것들이다. 신정국가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지 못하게 막는 것은 로마가 아니라, 바로 저들이다. 

 바로 그때, 선명한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옛날 갈릴리 호수 동편 산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어라. 보라, 날들이 이르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신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않은 배와 젖을 먹이지 않은 가슴들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들이 산들에게,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사람들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


*  *  *


 골고다, 곧 ‘해골 곳’에 커다란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탕!’

 그 소리가 한 번 들리자,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탕!’

 한 번 더 들리자, 악다문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죄인들의 손과 발을 파고드는 커다란 쇠못. 지금껏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그 저주의 도구가 세 사람의 살을 뚫고, 뼈를 스쳐 지나며 나무에 박히고 있다. 몇 번의 망치질 끝에 못이 나무 반대편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붉은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마른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의 울부짖음은 더욱더 커져갔다. 그렇게 세 개의 십자가가 언덕 위에 세워졌다.

 십자가형은 거의 천 년 전부터 주변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었던 형벌이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한 형벌이었기에, 주로 노예나 반란에 준하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선고 되었고, 십자가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대로변에 세워졌다.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 공화정은 카푸아에서 로마에 이르는 길목에 육천 개의 십자가를 세워 본보기로 삼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난공불락의 두로를 점령하고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천 개의 십자가를 세워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이 형벌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원래 나무에 달리는 것을 저주의 상징이라 여겼지만, 하스모니안 왕조의 왕이자 대제사장이었던 알렉산더 야나이 역시 백성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십자가 형벌을 사용했었다. 그는 자신에게 대항한 팔백 명을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본인이 잔치를 즐기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게 했고, 그들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그들 처자식의 혀를 잘라 내는 장면을 보여주도록 명령했다. 이와 같이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그 세부적인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잔인한 형벌을 사용하는 이유는 동일했던 것이다.

 이번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는 그런 면에서 유대인과 로마인 양쪽의 의도가 모두 담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중앙에 세워진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공격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양편의 두 죄인은 로마에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세상 권력을 적대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남자는 아까부터 정신을 차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못이 박히기 전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셔서 원래의 고통보다 덜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절하고 싶은 충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입장에서 아프다고 기절해 버린다면 이곳에 못 박힌 의미가 사라지니, 그는 어떻게든 버틸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중앙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양편의 두 죄인이 받아먹은 포도주를 맛만 보고는 마시지 않아, 있는 그대로의 고통을 가감 없이 받고 계신 예수님이 있었다. 고통으로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티는 그 모습을 보자, 남자는 다시 한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예수는 왜 저렇게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서 고난을 자초하는 것인가? 그가 메시야이든 아니든, 그가 자기의 능력만 잘 썼어도 저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그는 우리 열심당과 협력해서 무력을 얻지 않고도 충분히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로마가 유대와 사마리아를 직접 통치하는 것도 아켈라오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지도자들이 청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로마가 직접 지배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쓸 만한 왕의 재목이 있다면, 충분히 넘겨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진짜 이런 생각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만약 그가 자기의 능력을 로마에게 증명만 한다면, 그가 왕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비폭력주의자라 반항할 위험도 없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계층 간의 화합까지 만들어낸 사람이니 로마 입장에서는 오히려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런 가능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빌라도가 와서 그의 십자가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로마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이게 했다. 지도자들이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십시오.’ 하고 반대했지만, 빌라도가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대답하게 할 정도로 순식간에 인정받은 사람. 이게 바로 그이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가능성을 뒤로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타협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남자가 이렇게 탄식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고통 속에 신음하던 예수님의 입에서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남자뿐 아니라, 백성들, 대제사장과 그 일당, 예수님의 옷을 두고 제비를 뽑던 병사들까지 순간 멈칫하게 만든 목소리였다. 


*  *  *


 빌라도의 재판이 시작되고, 십자가가 세워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세 시간 남짓이었다. 보통은 바라바처럼 반란 시도를 하다가 로마에 잡혀 십자가형이 확정되어도, 상당 기간을 소요한 이후에 형을 집행하게 되는데, 이번만큼은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으니 정말 비상식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이 소문을 듣고도 설마 하며 믿지 못하던 사람들은 십자가가 세워진 이후에 급히 달려와 슬퍼하다 떠나갔고, 예수님을 싫어하던 사람들이나 의심하던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할 일을 마치고 느긋하게 나와 구경을 했다. 이들 중에는 아침 번제와 기도를 마치고 온 제사장도 있었고, 유월절 양을 잡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잘 섬긴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들의 진짜 정체를 증명해 주었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네 자신이나 구원하여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장로들도 비웃으며 말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로구나.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셔라.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그를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리라. 그가 말하길,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였노라.”

 “그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거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양쪽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각자 욕설을 쏟아내었고, 병사들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조롱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폭풍 같은 비난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의 풍랑 위를 고요히 걸어오신 그날처럼,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묵묵히 그 고난을 지나고 계셨다. 베드로처럼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한 사람을 기다리시면서 말이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남자는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던 남성의 말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그를 욕하는 자신의 행동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남성은 십자가를 대신 메고 가며 이런 말을 했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당신을 보니 이상하게 제가 예전에 알던 한 사람이 떠오르네요.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곡물 무역상을 하던 꽤 잘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실한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들과도 잘 어울리는 성격 때문에 유대인들의 비난을 받곤 했었죠. 하지만 그는 어떤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민족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도와주곤 했었거든요. 사실 저도 처음엔 그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로서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탈한 그의 성격에 끌려서 점점 친해지게 되었고, 나중엔 그가 구레네에 올 때마다 저희 집에서 머물곤 했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그 사람에게 왜 이렇게 사냐고 물어보니, 그는 자기가 만났던 한 부부와 아기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으로 자신이 눈을 뜨게 되었다고. 자신은 언젠가 꼭 성장한 메시야를 다시 만나 뵙게 될 테니, 그날을 위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고. 그는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몇 년 전에 지중해에서 폭풍을 만나 사망했지만, 지금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그의 따뜻했던 말과 행동이 떠오릅니다. 그 덕분에 저도 조금은 주변 사람들을 돕게 되었고요. 비록 제가 강제로 이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당신을 보며 울어주는 저 사람들의 모습만 봐도, 당신이 절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알던 그 사람을 통해 제가 변했듯이, 당신을 통해서도 저들이 변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예수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기뻐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삶. 그런 면에서 저 예수만큼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열심당에 충성했던 친구 시몬마저 그를 만나 변했다. 다른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를 만나면 사람들이 변한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그리스도가 맞는 것일까? 예언서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거리에 그 목소리를 들리게 아니하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라.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까지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 메시야 예언에 나오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이 바로 예수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는 말씀처럼,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찾아오는 모든 민족에게 공의를 베푼 사람.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한다는 말처럼, 먼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왔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온 사람들은 점점 변해갔다. 그렇다면 그분은 정말 이 예언을 성취하는 사람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저분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주 여호와께서 내게 학자의 혀를 주사, 지친 자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셨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니,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내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할 때,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니,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서자!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고 좀에게 먹히리라.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종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가운데 걸으며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신뢰하고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로 스스로 두른 자들이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은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 중에 눕게 되리라.”

 저분은 이 말씀처럼 사람들의 모욕 속에서도 마음 상해하지 않고, 모든 수치를 견디고 있다. 예언 속에서 하나님의 법정 앞에 ‘나와 함께 서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떤 조롱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한 태도. 저분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한 사람이라면, 그의 저런 태도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십자가 위의 남자가 예언과 예수님의 삶을 비교하며 놀라고 있을 때, 반대편에 있는 다른 죄수가 소리 질러 욕하며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조롱 섞인 말투. 아까 자신의 말투도 저것과 똑같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남자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또 다른 이사야의 말씀이 떠오르고 있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그가 들려지고, 높여지며,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놀랐으니, 이는 그 모습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형상이 사람의 아들들과 달라졌음이라. 그가 열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를 인하여 입을 다물리니, 이는 그들이 전해 듣지 못한 것을 볼 것이요,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그래, 저분의 지금 모습이 어떻든 간에, 저분은 예언에 나오는 그분이 맞으시다.

 남자는 큰 소리로 반대편에 있는 죄수를 꾸짖었다.

 “너도 같은 형벌을 받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에 마땅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반대편 죄인이 입을 다물자, 남자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폭풍 속에서 자기를 물 위로 걷게 해달라고 부탁한 베드로처럼, 그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다.

 그는 이 말로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고, 여기에는 그 어떤 율법이나 행함도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구원에 필요한 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뿐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시며, 고통 중에서도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남자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결국 구원에 이르렀다.


*  *  *


 낮 열두 시부터 시작된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은 빛 한 조각 보이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던 전날 밤의 어둠처럼 두려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모든 집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처럼, 진정한 어린 양의 피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 예비된 고난의 시간. 이것은 오직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넘을 수 없는 고난이었다. 이것을 모르고는 오후 세 시의 소제를 드리기 위해 준비하는 성전의 제사장들도, 저녁의 유월절 양과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는 백성들도 진정한 의미의 구원에는 결코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구원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제자가 도망친 와중에도 떠나지 않고 남은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로마 병사들의 경비 때문에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다가, 잠시 면회가 허용되었을 때 가까이 다가와 눈물을 흘렸다. 예수님은 이때를 이용해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고, 함께 다가와 눈물짓는 다른 여인들과도 눈을 맞추며 마지막을 준비하셨다. 오래지 않아 면회 시간은 끝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 다른 여인들은 다시 멀리 떨어져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세 시간이 흘렀다. 오후 세 시가 되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의미의 이 말.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광야로 나가야 했던 아사셀 염소와 같이,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아야 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는 신명기의 말씀처럼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저주를 받아야 했던 예수님. 이것은 예수님이 맡으신 여러 사명 중의 하나였다. 죄 없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의 사명과는 다른 의미의 사명. 이것은 시편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고,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주께서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를 신뢰하였으니, 그들이 신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를 신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사람들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가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였으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부터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모태로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가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둘러싸고, 바산의 힘센 황소들이 나를 에워쌌으니, 그들이 찢으려 포효하는 사자처럼 내게 그 입을 벌리고 달려드나이다. 나는 물처럼 쏟아졌고, 내 모든 뼈가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나이다. 내 입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으니,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무리가 나를 에워싸,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며, 내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생명을 개들의 손에서 구하소서. 사자의 입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를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외치셨지만, 그 의미를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라,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고통의 울부짖음을 비웃음으로 대답한 사람들. 예수님은 이들의 반응을 통해 모든 사명이 이루어졌음을 아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경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말씀하셨다.

 “내가 목마르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해면을 신 포도주에 푹 적셔서 우슬초 갈대에 꿰어 와서, 예수님의 입에 대어 마시게 하고는 말했다.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고 내려 주는지, 가만히 두고 봅시다.”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사람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불붙은 진노밖에 없었다. 이것은 다윗의 시를 통해 주신 예언이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니, 내게 응답하소서.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 가까이 오사 구속하시고, 내 원수들로부터 나를 속량하소서.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치욕을 아시나이다. 내 모든 대적이 주의 앞에 있나이다. 비방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을 바라나 아무도 없었고, 위로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이 쓸개를 내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 식초를 마시게 했사오니, 그들의 밥상이 그들 앞에서 올무가 되게 하시고,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그들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진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들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고,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고,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고통을 이야기하였사오니,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시고, 주님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시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오직 나는 괴롭고 고통스러우니, 하나님이여, 주님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리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하리로다.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여호와는 가난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갇힌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지로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의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그들이 거기에 거하여, 소유로 삼으리로다.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안에 거하리로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사면을 받지 못하고, 생명의 책에서 지워 버리라는 가장 무서운 예언. 그러나 이것은 예레미야의 예언과 이어져서 모세를 통해 주신 언약을 새 언약으로 바꾸기 위한 행동이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뽑고, 무너뜨리고, 파괴하고, 멸하고, 해치려고 깨어있던 것 같이, 그들을 세우고 심으려 깨어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날에는 그들이 더 이상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라고 말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가 그 이가 시게 됨같이, 각자 자기의 죄악으로만 죽을 것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하니,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 마음에 기록하리니,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아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 포도를 먹는 사람의 이만 시리리란 말씀처럼, 각자의 죄악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혈통으로 이어지던 옛 언약,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니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이면 당연히 구원받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나, 이방인이라도 유대교에 귀의해야만 구원받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 즉, 짐승의 씨가 되어, 언약에서 탈락한 생명의 책에서 지워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시편과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조롱하는 그들이 모두 심판받고 죽어야 예언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의 말씀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여전히 그들에겐 남아 있었다. 이것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냐고 외쳤던, 시편의 마지막 내용과도 연결되는 내용이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고통받는 자의 아픔을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큰 회중 가운데에서 드리는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들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니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님 앞에 경배하리니, 주권은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통치자이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요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생명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하리니, 그들이 와서 그의 의를 장차 태어날 백성에게 전하고, 주께서 이를 이루셨다 할 것이로다.”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찬양하고, 땅끝에 사는 사람들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 이것이 이 모든 저주에서 이어지는 진정한 구원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짐승의 씨처럼 예수님을 모욕하고 죽이는 악한 역할로 쓰임 받는 그들일지라도, 부활의 아침이 밝고 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진정한 회개로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시면서까지 이루고자 하신 새 언약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

 이로써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기셨던 모든 사명을 완전히 다 이루셨다. 하늘을 보며 잠시 미소를 지으신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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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시 22:1-31, 69:16-36, 사 42:1-4, 50:4-11, 52:13-15, 렘 31:27-34, 마 5:4, 27:40-49, 막 15:29-36, 눅 23:28-46, 요 19:21-22, 28-30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성경 원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평행 구절의 경우, 모든 내용이 다 포함되도록 하나로 합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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