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룟 유다

저자의 글

 제가 지금까지 표현한 가룟 유다의 이미지가 상당히 생소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그가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고,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한 것으로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의 동기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나왔습니다. 지금부터 이런 여러 관점들에 대해 말할 것인데, 그 전에 그의 동기로 지목된 ‘돈’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전에서 사용하는 두로의 세겔 하나는 4데나리온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하는데, 30 세겔이면 120 데나리온, 즉, 일반 품꾼의 넉 달 일당 정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또한 적지 않은 돈이지만, 당시 서기관의 봉급이 한 주에 12데나리온이었으니, 서기관이었다면 10주, 즉 안식일을 제외하고 60일을 일하면 받을 수 있는 돈이었고, 일반적인 탈리트(겉망토) 하나의 가격이 12 데나리온, 부자들이 사용하는 망토 하나의 값이 100~200 데나리온 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30 세겔의 가치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가난한 사람이 제물로 바치는 비둘기 두 마리의 가격이 기원후 1세기 중엽에 금 1데나리온(은 25데나리온)으로 급상승한 적도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얻은 돈이 그렇게 엄청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그 전부터 돈주머니에 손을 대왔기 때문에(요 12:6) 돈만이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그대로 있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가룟 유다의 동기에 돈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기독교 초기부터 있어 왔고, 가룟 유다에 대해서 다양한 설정을 하곤 했었습니다. 구약으로 치면 위경에 해당하는 신약 외경의 ‘유다 복음’은 영지주의자 중에서도 극소수인 그노시스파 이단이 사용하던 것인데, 유다가 실제로는 진리를 가장 먼저 깨닫고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 배신을 했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 당시부터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여겨졌는데, 성경의 내용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다 복음 외의 다른 설명에도 제자 중 가장 통찰력이 있는 유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행동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그의 내면의 목적을 생각한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세상을 변화시킬 분으로 생각하고 따랐지만, 그럴 의지가 전혀 없는 것에 실망하여 팔아넘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두 가지 정도로 내용이 갈라지는데, 진짜 실망해서 팔았다는 설과 팔려고 하면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이라도 하실 것이라 기대했다는 설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에 대한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 여러 저작과 문학, 연극, 영화 등으로 제작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저는 성경의 내용 그대로 설명하되, 그 안에서 그가 가질 수 있었던 동기를 하나 더 추가해 보았습니다. 바로 ‘높아짐’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도 안 빼고 서로 높아지려고 안달이 나 있었으니, 저는 이런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가룟 유다가 초기부터 예수님을 팔 역할로 선택된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이건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일 수도 있고, 열두 제자로 선택받기 전에 했던 생각과 행동들을 고려해 그를 파는 역할로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알지 못하나, 결국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선한 자를 들어서, 악한 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완전히 선한 자가 없기에,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도 악한 행동을 할 순 있지만, 최소한 그가 악한 상태로 빠진 이후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 다 회개하고 깨끗한 사람을 들어서 악한 행동을 하게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자살에 대한 부분 역시 조금 다른 시각으로 풀어보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본문에서 다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이것이 ‘그의 자살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을까?’라는 제 고민에 대한 해답으로 쓴 것이라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에는 제 개인적인 욕심이 담겨있고, 이런 이유로 성경적인 내용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화를 당할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행전에서 그의 죽음이 예언의 성취라 말한 베드로의 표현이 꼭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실현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언이 이루어지는 조금 다른 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런 하나님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사도행전과 같은 성경의 내용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경 그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성경이 다르게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회개한 가룟 유다가 살아있는 내용으로 말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의 죽음이 심판의 의미로서 예정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길 바라시지만, 무한히 기다려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을 운명이고, 죽은 후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가 죽기 전에 그 악을 회개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죽음일지언정, 회개하지 않은 그 책임은 그 자신에게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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