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 (2)

실로암 연못 가에서 눈을 뜨고 기뻐하는 장님

 “어떻게 네가 보게 되었느냐?”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인 정중앙에 얼마 전까지 맹인이었다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서 있다. 험악한 눈길을 보내는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약간은 위축된 모습의 그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셨고, 내가 씻었더니, 지금 보나이다.”

 예수라는 사람은 그날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해놓고선, 또다시 안식일에 사람을 치료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이쯤 되면 일부러 안식일을 골라 사람들을 고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였으니, 바리새인들의 인내심도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그가 치료했다고 알려진 남자를 불러들여 심문을 하게 되었다. 

 이 심문의 결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오.”

 이것은 대다수 바리새인의 입장이었는데, 그들은 예수가 아무리 엄청난 기적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상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일 리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반대되는 의견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소수의 주장이었는데, 그가 행하는 기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니고데모가 이쪽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사실 이쪽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유대인에게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도대체 누구에게서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른 신에게서 왔다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을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이니 그건 불가능하고, 남은 선택은 그가 사탄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보인다고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가 보이는 기적들이 사람을 살리는 것과 같은 선한 것들뿐이라 머리가 아픈 것이다. 심지어 그는 사람들을 고쳐주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고 하니 말이다.

 이렇게 양쪽 다 나름의 일리가 있었기에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자신은 아직도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서,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중이다. 그때 성전에서 예수가 하는 말에 경악하고, 또 화가 난 부분도 있지만, 그 이후로 허투루 흘려보낼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마음속을 맴돌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몇 있는 듯, 자기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로 온통 시끄러운 와중에서도,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사람이 조금 보인다. 그중의 한 명이 입을 열어 남자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너의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겠느냐?”

 “그분은 선지자입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쉽게 확신할 수 있을까? 아리마대 요셉은 남자에게서 들었던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남자는 여느 때처럼 길가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이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입니까?”

 그 말을 듣고 남자는 좀 기분이 상했지만, 그동안 한두 번 들어본 말도 아니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다음 들려온 말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니, 오히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이 말을 듣고 자신 또한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율법을 기준으로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삶을 살아오다 보니, 모든 일에 있어서 이분법적인 사고만 하던 자신에게 전혀 다른 시각이 있음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죄도 아닌,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 이걸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다른 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예수는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확실히 세상의 빛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존재조차 몰라 어둠 속에 있던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해 주니 말이다.

 아무튼 이 말이 들린 다음에 남자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자신의 눈에 진흙을 바르는 것을 느꼈고,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남자는 그의 말대로 하부 도시에 있는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었고, 그 즉시 눈이 밝아졌다고 한다.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남자를 보고 여러 사람이 놀랐는지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냐는 질문에 남자는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기에,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 사람이 눈을 뜬 건 축하할 일이지만, 남자가 치유 받은 날이 또 안식일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이런 심문과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선지자라 말하는 남자의 말과 표정에 눈살을 찌푸리는 바리새인들도 여럿 보인다. 그들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든 다 싫을 것이다. 남자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어서 화가 난 상태인데, 뭐가 곱게 보이겠는가? 남자가 떠난 이후에도 회의는 계속되었다. 여전히 회의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반대파들이었다.

 “저 사람의 말이 진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단 말이오.”

 “맞소이다. 구걸이나 하던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반론도 있었다.

 “그를 알던 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그가 맹인이었음을 증언하오. 그러니 그의 말은 진실일 것이요.”

 그러나 재반론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왔을 수도 있지 않겠소? 일 하기 싫어서 계속 구걸이나 하려고 말이오.”

 저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점점 짜증이 올라온다. 요즘 들어서 바리새인들의 행동이 자꾸 거슬리는 걸 보니, 확실히 자신의 마음도 예전 같지는 않은 것 같다. 맹인이었던 남자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저들은 이미 마음에 답을 정해 놓았으니 통할 리 만무하다. 저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배척하기로 결심하고 있었고, 자기들의 의견을 지지해 줄 증거만이 필요했을 것이다. 진실 앞에서도 저러는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한 모습을 보일까? 심히 걱정된다.

 아리마대 요셉의 우려대로, 회의장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다 회당에서 내쫓기로 결의했다. 그다음 그들이 밟은 수순은 남자의 거짓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자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예수가 치료했다던 모든 사람이 다 이와 같이 거짓으로 꾸며진 자들이었다고 공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와 부모를 불러들였다.

 “이 사람이 너희가 맹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너희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

 “우리는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태어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남자의 부모는 자기들을 노려보는 바리새인들에게 겁먹은 듯,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증언은 했지만, 눈을 뜨게 된 계기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들 역시 누가 아들의 눈을 고쳤는지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런 협박하는 분위기에서는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하기 전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을 거라고 미리 경고하는 데 어떤 사람이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부모의 말에 어쩔 수 없음을 느낀 바리새인들은 다시 눈이 멀었던 사람을 그들 앞에 세웠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는 그 사람이 죄인인 것을 아노라.”

 바리새인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남자를 어떻게 해버릴 것처럼 위협적으로 말했다. 지난번이 진실을 밝히기 위한 단순한 취조였다면, 이번은 그에게 거짓 자백을 강요하는 자리였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며 아리마대 요셉은 점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진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일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악한 방식을 사용하는 그들 안에 과연 의와 진리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본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괴로워하던 아리마대 요셉의 귀에 남자의 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에 눌려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하던 그의 변화. 그 모습이 아리마대 요셉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친구인 니고데모도 그렇지만, 예수라는 분과 만난 사람은 왜 이렇게 다들 변해가는 것일까? 그분의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용기 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일까? 아리마대 요셉은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했어도 듣지 아니하였는데,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합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것입니까?”

 이제는 당당한 태도를 넘어 거침없는 질문까지 하는 남자였다. 그의 모습을 보고 많은 바리새인들이 욕설을 퍼부었지만, 남자는 절대 자신의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그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이상하군요. 그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태어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으리이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

 이 말을 끝으로 남자는 밖으로 쫓겨 나갔다. 아리마대 요셉은 화가 나서 씩씩대는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절망에 빠졌다. 저 보지 못하던 남자가 눈을 뜨고 기뻐하는 동안, 저들은 그저 죄냐 아니냐를 따지며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저들은 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에 집착하는 것인가?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내가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정말 이들은 하나님께 이런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은총과 연합이라는 지팡이를 꺾어버리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자들. 그리고 이들에게 욕을 먹고, 상처를 입은 것은 이스라엘의 한 백성이다. 눈먼 거지였다가 이제야 겨우 눈을 뜬 그에게 세상에 이런 악한 자들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만 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급히 일어나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  *  *


 “네가 인자를 믿느냐?”

 남자를 찾아간 곳에는 남자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둡던 세상을 밝게 만든 세상의 빛이 계셨다. 

 “주여, 그분이 누구십니까? 내가 그분을 믿고자 하나이다.”

 남자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

 “네가 이미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바로 그이니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분 앞에 엎드린 남자의 뒷모습을 보자, 아리마대 요셉은 마음이 찡해졌다. 그렇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진짜 목자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사두개인들이 아니라, 저분 같은 사람이다. 

 “내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눈멀게 하려 함이라.”

 그분의 옆에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화난 듯 말했다.

 “우리도 눈먼 사람이란 말이오?”

 “너희가 만일 맹인이었다면 죄가 없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 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언제나처럼 굳어지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표정. 아리마대 요셉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아니다, 그런 걸로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된다. 저건 걸려 넘어지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아직 늦지 않았으니 돌이키라는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도둑이요 강도니,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들의 목자니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들을 다 내어놓은 후에 그가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여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시는 그분이지만, 뭐 어떠랴.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밝히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빛 앞에서 어둡던 세상이 환해지듯, 알아듣지 못하던 사람들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도둑이요 강도니,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 드나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오직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자기 양이 아니니,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서,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그가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내게 있어, 그들도 내가 인도하여야 하리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인도함을 받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라. 아무도 내게서 이를 빼앗지 못하리니,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스가랴 11:6, 요한복음 9:2-10:18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성경 원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오디오북으로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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