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마르다]

 사랑하는 오빠 나사로가 갑자기 죽은 이후로 동생 마리아는 세상을 다 잃은 듯 정신 줄을 놓고 울기만 한다. 그런 동생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마음도 미어지지만, 오빠는 이미 죽었고 누군가는 장례를 치러야 한다. 자신마저 슬픔에 빠져있다면 누가 이 모든 일을 치를 수 있겠는가? 베다니는 물론이고, 가까운 예루살렘에도 오빠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장례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찾아올 것이다. 그들을 접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라도 힘을 내야 한다.

 마리아는 막내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지난번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셔서 자신의 집에 머무르실 때에도 마리아는 그 많은 사람을 접대하는 걸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 곁에 딱 붙어서 말씀만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 얄밉게 보여, 예수님께 부탁드려서 동생도 자신을 돕게 하려 했는데,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그러나 좋은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니, 마리아는 이 좋은 몫을 택하였고, 그녀는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그 청을 거절하셨다. 동생이야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때에는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으니, 예수님께 부탁드린 것인데, 예수님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말씀을 하신 것이다. 

 뭐 그렇다고 예수님까지 덩달아 미워진 건 아니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세상을 온통 떠들썩하게 만들고 계신 분 아니신가? 그분의 말씀과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들만 봐도, 그분은 정말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집에 오셨을 때, 칠십 명인가, 칠십 두 명인가 되는 제자들을 둘씩 나누어 전도 여행을 보낸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제자들도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귀신까지 쫓아냈다고 하니 정말 그분이 하시는 일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이 하셨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는지 여러 제자가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전도 여행에서 한 일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여,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그러고는 제자들을 보시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들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고 있는 것들을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고 있는 것들을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 말을 듣고 자신 역시 그런 기적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렇게 대단하신 예수님은 지금 세례 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던 요단강 동편에 가 계신다. 만약 예수님이 오빠가 죽기 전에 이곳에 계셨다면 오빠가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미 오빠는 죽어버렸으니 그런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마지막 부활 날에 오빠도 다시 살아날 테니,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으니 말이다.


*  *  *


[베다니의 마리아]

 예수님을 부르기 위해 보낸 사람은 오빠가 죽은 다음 날에야 돌아왔다. 그때도 이미 늦어 장례가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함께 오시기만 했다면 지금과 같이 원망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붙잡고 우리 오빠가 죽기 전에 오셨다면 오빠가 살 수 있었을 거예요 하고 펑펑 울 수만 있었다면, 나사로 오빠를 사랑하시는 그분과 함께 오빠를 추억할 수만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고, 오늘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조차 없으신 그분.

 언니는 지난 수전절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던 사건을 말해주면서, 예수님을 이해해 주자고 했지만, 자신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시던 분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냐는 마음이 드는 건 자신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죽어가는 그 사람을 살린 것은 제사장도, 레위 사람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바로 진짜 이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유대인들에게 경멸받는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 땅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 놀랍고 대단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원망하게 하는 말씀이 되어버렸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아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도, 오빠를 살리시기 위해, 아니 죽은 오빠를 만나로라도 오셔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휴…. 자꾸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예수님이 계속해서 원망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루빨리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언니처럼 장례식에 오는 사람들을 접대하고, 그들에게 식사라도 차려주어야 할 텐데, 눈물만 날 뿐 도무지 힘이 안 난다. 이러다 갑자기 예수님이 오시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분을 아무렇지 않게 만나 뵐 수 있을까? 


*  *  *


 “마르다, 마리아. 예수님께서 오고 계시데요.”

 두 자매를 급하게 찾는 한 사람의 목소리. 그는 가까운 마을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이곳에 머물 때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자기도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는 몇 마리의 나귀를 키우는 중인데,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가장 귀한 나귀도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다고 말하던 터라,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가장 민감했으리라. 마르다는 이 말을 듣고는 동생에게 말했다.

 “마리아야, 어서 나가서 예수님을 모셔 오자.”

 “전 안 갈래요….”

 마리아는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혀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세 남매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따르던 애가 이러니 언니인 마르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예수님이 일찍 오셨어도 오빠가 죽기 전에 도착할 수 없었다고, 그녀가 누누이 말해주었는데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리아. 오빠의 죽음은 마르다 역시도 정말 슬펐지만, 이제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오빠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고, 동굴 안에 매장까지 다 끝난 상황이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답답한 동생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동생 성격에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으려고 할 것을 알았다.

 그렇게 마르다는 동생에게 한 번 더 권유하려는 생각을 접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을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녀가 간 곳에는 예수님과 이미 잘 알고 있는 열두 제자들, 그리고 다른 제자들까지 함께 있었다.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께 주실 줄을 아나이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차분하게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 주님.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로하시기 위해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며, 이 말을 끝으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려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개를 저으시며, 마리아를 데리고 오라는 말씀만 하실 뿐이었다. 마르다는 집으로 돌아가 마리아를 가만히 불러서 말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통곡하는 마리아. 그녀가 오빠의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고, 따라와 위로해 주려 했던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예수님의 목소리에도 비통함과 괴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한 사람이 앞장서서 나사로가 묻힌 동굴로 이끌었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마리아와 사람들의 울음소리는 계속되었고, 그사이 도착한 마르다와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 슬픔의 행렬에 동참했다. 그들을 보며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 

 “보라, 그가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이 사람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모두가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비난하는 소리 역시 들려왔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얼마 가지 않아, 일행의 앞에 나사로가 묻힌 무덤이 나타났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동굴. 돌로 입구가 막혀있는 그 안에 나사로의 시신이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위해 울어주시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돌을 옮겨 놓아라.”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의 대답. 사람들은 모두 마르다가 한 말에 동감했다. 사람이 죽어 오래된 무덤을 무엇 때문에 연단 말인가? 들어가서 그를 만지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누구든지 죽은 자의 시체를 만지면 일주일 동안 부정하다고 토라에 기록되어 있는데, 저분은 왜 스스로 부정해지는 행동을 하려 하시는 것일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너무나 확고한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먼저 움직였고, 다른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을 옮겨 놓았다. 그리고 무덤에서 물러난 사람들.

 예수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셨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추는 것처럼, 잔뜩 흐린 구름 사이에 드러난 새파란 하늘. 그 티 없이 맑은 하늘이 예수님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버지께서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가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것은 작고 고요한 목소리였지만, 주위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마음에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예수님은 고개를 숙여 동굴 쪽을 보시며 큰 소리로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예수님의 말을 듣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성경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몇 군데에 있지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이 살아났다는 기록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기록은 그냥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라 말하기도 했던 것이다. 사두개인들이 이런 부류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토라만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역사서에 있는 이런 기록들은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면,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큰 사건이 될 것이다. 부활이 실존한다는 확실한 증거로서 말이다.

 모두의 시선이 어두운 동굴에 쏠려 있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셨다. 예수님을 통해서라면 죽은 자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동굴의 어두움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져 무섭게 보일 수도 있는 형상.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가 죽었던 오빠, 나사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비록 가려져 있다곤 하나,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을 보고,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함성 속에서 예수님의 밝고 선명한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여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다시 살아난 오빠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확고한 진실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었으니, 그들 중 몇몇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  *  *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만일 우리가 그를 그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늘 반목하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한마음이 되어 공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무하는 예수님에 대한 공격들. 공회원 중에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처럼 예수님을 몰래 따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이 단 한마디라도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온 공회에 퍼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엔 산헤드린 공회의 주류인 사두개인들까지 예수님을 향한 공격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사두개인들의 교리가 틀렸다고 말하는 확실한 증거였으니,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사두개인의 입지가 완전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두개인은 지방에 가면 바리새인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었을 뿐이지만, 예루살렘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권력자들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구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소.”

 예수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그에게 넘어갈 것이고, 그러면 로마가 자신들을 핍박해 민족 전체가 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가야바. 이것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악한 역할로 쓰임 받은 이방 나라들처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악한 역할을 맡은 가야바. 이것은 그가 이미 하나님보다 자신 가문의 영달, 아니 그 자신의 권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맡겨진 역할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선한 자를 들어서 악한 일에 사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누구든지 예수가 있는 곳을 알거든 알려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을 안 예수님은 유대 지방을 떠나 광야에서 가까운 에브라임이라는 마을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누가복음 10:21-24, 41-42, 요한복음 11:21-50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성경 원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오디오북으로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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