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예수님은 외국으로의 여행이 부쩍 잦아지셨다. 지난번엔 두로에서 머무르셨고, 그다음엔 시돈을 거쳐 갈릴리 바다 동남쪽 데가볼리 지방을 지나, 다시 갈릴리. 그리고 이번엔 헤르몬산 아래에 있는 분봉왕 빌립의 수도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이동하셨다. 예수님의 의도야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으신 것이겠지만, 돈 자루를 맡고 있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그다지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소문이 워낙 멀리까지 퍼졌으니 가만히 갈릴리에 계셔도 사람들이 알아서 몰려올 텐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실까? 그 덕분에 여행 경비만 계속 늘어가고 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만 돌아다녀도 한가득인데, 거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제자와 여인들까지 있다. 아니, 이 여정이 뭐라고 그들까지 계속 따라다니는 것일까? 아무리 그들이 예수님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냥 각자의 삶을 잘 살면서 예수님이 오실 때만 함께 하면 충분할 텐데, 왜 그들까지 끼어서 자신을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유대와 갈릴리 지방을 돌아다닐 땐 호의적이고 부유한 유대인들이 좀 있어서, 그들을 통해 거처와 음식을 제공받기에 부담이 적다. 하지만 이런 이방 도시들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유대인이라고 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반겨주지 않을 때는 여지없이 돈을 써야 한다. 그러니 인원이 많아질수록 감당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것뿐이랴? 숙식이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들이 나타난다. 이 많은 사람이 먼 거리를 걸어 다니면 신발이 남아나질 않으니, 그것도 사줘야 하고, 그 외에 필요한 물품도 한두 개가 아니다. 국경을 건널 때에는 통행료까지 대신 내줘야 한다. 그냥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만 조용히 다니면 간단히 풀릴 문제인데, 필요 없는 사람들까지 함께 따르면서 문제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든 해서 이 문제를 겨우 해결하고 나면, 예수님은 갑자기 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제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돈은 또 어디에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예수님은 있는 돈이라도 잘 모아서 사용할 생각을 하셔야지, 아끼지 말라고만 하신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니, 하물며 너희를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말이다. 물론 맞는 말씀이다. 돈이 없어도 어떻게든 먹고는 살겠지.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게 정말로 제대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 고생을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뭔데? 다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나라가 속히 오길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나중에 예수님께서 건설할 왕국을 위해서라도 미리 돈을 모아놓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의 문제라 하시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시지만, 자신이 생각할 때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 놓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지만, 내일 걱정이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걱정을 할 수 없겠는가?
지난번에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성인 남자만 오천 명 이상 되는 엄청난 인원을 먹이시고, 이번에도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 이상을 먹이신 것은 자신도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계속 그렇게만 하신다면 경제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고, 자신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지 않으신다. 그때에만 그렇게 하시고, 이후에는 전혀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사람들을 고쳐줄 때도 동전 한 닢이라도 받으시면 좋을 텐데, 예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공짜로 고쳐주신다. 뭐 굳이 따지자면 사람들의 믿음을 받으신다고 해야 할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믿음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예수님은 그것을 강조하시는지 모르겠다.
전에 자신을 포함한 열두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실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충분히 많은 것을 챙길 수 있음에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필요 없을 거라고 말이다. 자신 역시 처음엔 걱정이 많았지만, 직접 가보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긴 했다. 자신 때문에 사람들의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 나간 경험은 정말이지 놀라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좋고 말 것이라면, 도대체 그런 능력을 왜 주셨는가 말이다. 예수님의 그런 대단한 능력을 조금만 더 제자들을 위해 사용하시면 좋을 텐데,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제자들이 헷갈리는 것이고, 지난번에 많은 제자들이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된다.
예수님에 대해 불만이 있는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유력자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자신 같으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굳이 다툼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신뢰받는 그들이 예수님을 인정해 준다면 나중에 왕국을 만드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옛날 하스모니안 왕조가 세워질 때도 하시딤들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루었으니, 하시딤의 후손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편이 되어 준다면, 이번에도 독립은 문제없을 텐데 말이다. 사두개인도 마찬가지이다. 귀족으로서 권력을 가진 그들이 도와준다면 일이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 더군다나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는 두 거대 세력이 예수님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된다면 그 홍보 효과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그 기회를 계속 발로 차신다.
얼마 전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보여 주실 수 있는 기적 중 하나만 보여줬어도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보여 줄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하시며 그들을 피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도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니,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니,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들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두 번에 걸친 요나의 표적 말씀을 떠올리자, 가룟 유다는 머리가 아파졌다.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 처음엔 장부 정리 때문에 짜증이 나 있었는데, 이제는 뭔 소린지 알지도 못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 다른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이 물 좋고, 아름다운 곳을 구경하고 있는 동안, 자신은 답 안 나오는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돈주머니를 맡은 자로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혼자만 고생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억울하다.
열두 제자 중에서 자신만 유대 출신이라 무시를 당하는 건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돈주머니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 중에서 자신이 제일 믿을 만해서 주신 게 아니겠는가? 그래 다른 제자들이 갈릴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은 유대를 홀로 대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더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유대인의 근본은 유대 땅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암튼 자신도 좀 돌아다녀야겠다. 혼자서 이러고 있으니, 생색이 나서 안 되겠다. 이렇게 혼자 희생할 거면 일당이라도 계산해서 조금이라도 챙겨야지 원.
가룟 유다는 겉옷을 챙겨 입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화려한 가이사랴 빌립보의 거리가 그가 가진 돈주머니를 유혹하고 있었다.
* * *
“사람들이 나, 곧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는 길.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질문을 하셨다. 항상 자신에 대해서 알리고 말하는 것을 삼가도록 가르치시던 분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변화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예수님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오천 명 넘게 먹이신 그곳에서는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셨고, 귀신들이 쫓겨 갈 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면 엄하게 꾸짖으시곤 하셨다. 세례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조차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으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던 초기부터 따라다닌 제자들은 예수님이 스스로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하셨다거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오시리라 예언된 메시야가 본인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안에서는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는 것 같다. 기억에 남는 표현은 기껏해야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정도? 그랬던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시다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런 질문을 하신 것일까?
가룟 유다가 궁금해하는 사이, 제자 중 누군가가 대답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표정을 보자 가룟 유다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 말은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걸어오신 예수님께 모두가 고백했던 말일 뿐인데, 왜 저렇게 좋아하시는 것일까? 아무런 기적을 보여 주지 않으셔도, 저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신 것일까?
이러한 의문이 해결되기도 전에 가룟 유다의 귀에 들려온 다음 말은 더욱더 충격을 주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아니, 저 말씀은 베드로를 제자 중에서 최고로 놓으신다는 의미가 아닌가? 물론 그가 예수님을 처음부터 따라다닌 사람 중 하나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만약 저 말을 자신이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베드로가 들을 말을 자신이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모두가 했던 고백을 다시 먼저 했다는 이유로 최고의 제자 취급을 받은 베드로를 보자 질투심이 올라왔다. 마음속에 베드로 다음엔 누가 높은가 하는 마음이 생긴 건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가룟 유다처럼 질투심이 크게 생긴 사람은 없었다. 가룟 유다는 다음번에 이와 비슷한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자신이 가장 먼저 움직이겠다고 다짐했다. 누구보다 더 높아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그를 사탄의 유혹에 빠져들게 한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일이 생기고 있는지를 아시는 예수님은 엄하게 경고하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에 살아나야 하리라.” 메시야, 즉,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기대처럼 유대 독립 왕국의 왕이 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을 대신해 죽어야 하고, 다시 살아나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 예수님은 그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각자의 관점으로만 판단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였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믿음으로 칭찬을 받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따르던 그의 변화. 베드로는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주님의 길을 방해하려 했다. 이렇게 사탄은 자신의 계획을 조금씩 실행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스스로 포기하시게 할 수는 없으니, 주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려는 것이다. 겉으로는 좋아 보이나, 결국엔 사람들의 구원을 막으려는 악한 수작들. 예수님은 돌아서서 베드로를 크게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서슬 퍼런 호통에 놀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예수님은 그를 잠시 보시고는 모든 사람을 불러놓고 소리쳐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든지 빼앗기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드디어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마태복음 12:39-42, 16:2-4, 13-28, 마가복음 8:27-9:1, 누가복음 9:18-27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성경 원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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