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에서 서북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산맥을 넘으면 지중해 연안의 오래된 도시 두로가 있다. 두로는 페니키아인들이 만든 도시로서 옛날부터 이스라엘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윗은 두로왕 히람과 친분이 두터워 그로부터 백향목과 석수, 목수를 지원받아 궁궐을 지었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 역시 히람에게 기능장과 백향목, 잣나무, 금 등을 지원받아 성전을 지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히람이 솔로몬에게 보낸 금액은 금 백이십 달란트나 되었는데, 이것은 백만에서 이백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받는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두 나라는 이런 돈을 서슴없이 지원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그들의 부가 엄청났다는 말이기도 했다.
페니키아인들은 고대 이집트와 헷 족속의 나라 히타이트, 아모리인의 바빌로니아가 각축을 벌이던 와중에 성장했는데, 우수한 항해술로 지중해 연안 각지에 도시국가들을 세우고,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다. 이들이 세운 도시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멀리 이베리아반도까지 존재했는데, 그들 중에는 서지중해에서 로마와 대등하게 싸운 한니발의 고국 카르타고도 있었다. 이들 도시는 서로 간에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었지만, 페니키아인들의 문화 중심지이자, 강력한 도시국가 중 하나는 단연코 두로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두로에 대해 이사야, 에스겔, 아모스 선지자가 심판의 예언을 하기도 했는데, 성전을 짓는 데 큰 도움을 줄 정도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던 그들의 악이 점점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이 받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북이스라엘을 바알 우상으로 물들인 왕비 이세벨이 두로와 더불어 페니키아의 강력한 도시국가였던 시돈 왕의 딸이었고, 가나안과 페니키아의 우상 중 하나인 몰렉이 유대까지 퍼져 부모가 갓난아기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말씀까지 하셨을까.
“그들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산당을 건축하고, 그 아들들과 딸들을 불에 태웠나니, 내가 명한 일도 아니며,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지도 않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일들을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바로 남쪽의 골짜기에서 저지를 정도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 당시의 유대인들은 타락했고, 이 과정에 두로와 같은 페니키아인들의 영향이 상당히 컸던 것이다. 유대인뿐 아니라 그들 역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 일에 앞장섰는데, 로마와 싸운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 주민들은 하층민들의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도 전투에서 지자, 귀족들까지 앞다투어 자신의 갓난아기를 몰렉의 아궁이에 태워 죽이는 역겹고도, 증오스러운 일들을 저질렀다. 이때 죽은 갓난아기가 삼백 명이 넘을 정도였으니, 선지자들이 그들에 대해 심판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심판의 예언대로 두로는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킨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크게 파괴되었고, 나중에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이후로 두로는 그리스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지금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 * *
두로로 가는 산길을 걸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쳤다. 얼마 전 가버나움을 떠나신 예수님께서 두로에 계시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그분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길 바라신다는 듯,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셨지만, 아무리 숨으셔도 그분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자신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두로를 향해 출발했다.
“선생님은 왜 그런 곳에 계시면서, 아무 말도 없으셨던 거야.”
막달라 마리아는 이런 예수님의 태도에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시는 것 같아 속상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은 이성적인 의미보다는, 존경의 의미가 더 컸다. 그녀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녀가 일곱 귀신에 들려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죽음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찾아오셔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모두가 피하기만 하던 그녀의 어두운 인생은 예수님으로 인해 빛을 찾았고, 이후로 그녀는 계속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기고 있었다. 예수님이 기적을 보여주실 때 그녀도 곁에 있었고, 가르침을 주실 때 그녀도 그곳에 있었다. 이러니 어떻게 그녀가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런 그녀처럼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던 여인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헤롯 안티파스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등도 그녀와 같이 예수님을 돕던 여인들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보통 그녀들 중 누군가와 함께 다니곤 했지만, 이번엔 급한 마음에 서둘러 길을 떠나온 터라 혼자였다. 때문에 조금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누군가와 발맞추어 가지 않아도 되니, 그만큼 일정을 단축시킬 수 있는 장점 또한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막달라 마리아는 조금의 지체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잰걸음으로 서둘러 산을 넘어갔다.
예수님은 왜 그런 곳까지 가셨을까? 막달라 마리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실 때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의 마을엔 들어가지 말라 하시고는,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그곳들을 돌아다니시는 것이다. 데가볼리의 마을에도 가시고, 사마리아도 가시고, 이제는 아예 두로까지 가셨으니. 이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멀리 떠나버리실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녀의 마음에 불현듯 찾아왔다.
그래, 이게 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때문이야. 얼마 전에 찾아온 그들 때문에 예수님이 두로로 피하신 게 분명해. 아니,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는 전통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먼 길을 와놓고선 그런 지적질이나 하고 있는 거야? 전엔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 가지고도 공격하더니, 그들은 왜 그렇게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냐고!
그녀는 그때 일을 생각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곧 떠오르면서 마음이 다시 진정되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신랄한 지적을 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릴 도움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 되었다고 선포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은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니 사람을 더럽히지 않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들, 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에서 나오는 악하고 나쁜 생각인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악한 시선, 모독, 교만, 어리석음과 같은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들과 완전히 다른 가르침. 자신은 그 말씀을 들으며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는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오히려 몹시 분하게 여길 뿐이었다. 그렇게 사사건건 예수님을 트집 잡는 바리새인들이었으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멀리 두로까지 가신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눈앞에 두로가 보였다. 한때는 예언처럼 폐허가 되었던 도시지만, 다시금 사람들이 모여 예전의 명성을 찾은 도시. 수많은 배들이 도착하고, 수시로 떠나가는 무역항. 뱃사람들의 활기가 넘쳐나는 그곳 어딘가에 예수님이 계신다. 막달라 마리아는 피곤한 것도 잊고 도시를 향해 뛰어갔다.
* * *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심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한 여인의 간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간 곳에서 터져 나온 음성이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여인이 보이는 곳까지 간 마리아. 그곳에는 제자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과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여인이 계속해서 외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 마리아는 그 모습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응? 예수님이 왜 저러시지?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한 적이 없으시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언제나 따뜻한 미소로 안아주시고, 치유해 주셨는데, 예수님은 왜 저 여인은 모른 척 하시며 한 마디도 하시지 않을까?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 곁으로 달려갔다. 그때 예수님께 간청하는 제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보내소서. 그녀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예수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냉정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시는 것일까? 마리아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녀가 유대인이 아니라서 그러신다는 것인데, 이상한 점은 예수님은 이미 예전에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을 고쳐주시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그땐 고쳐주시다가 이제는 안 된다고?
마리아뿐 아니라 누구인들 이 상황이 이해가 되겠는가?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들은 물론이고, 이 사건을 지켜보는 제삼자인 두로인들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가끔 이렇게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말씀과 행동을 하시곤 하는데, 몇 번이고 곱씹어 보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물론 예수님은 이렇게 충격을 주시고, 금세 진짜 의도를 나타내시기 때문에 이해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아직 예수님의 궁극적인 의도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그저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싸늘한 예수님의 태도에도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간절한 여인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말투.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여전히 차가웠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누구라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여인의 표정도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의 진심이 담긴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로 페니키아에서 태어난 그리스 여인. 수많은 신들을 섬기며 그들을 위해 악한 제사도 서슴지 않았던 부유한 페니키아와 더 많은 신들을 섬기면서도 인간의 이성이 극도로 발달한 그리스. 두 나라의 핏줄과 문화를 물려받은 여인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런 그녀에게 들린 음성.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여인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차가운 표정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곳에는 겨우내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는 봄날의 따스한 햇살 같은 예수님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괴로운 심정을 포근히 감싸주는 듯한 목소리까지…. 여인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집에 도착하는 순간, 여인은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 자신의 딸이 나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로 돌아오셨다. 일부러 이방인들이 사는 곳을 지나신 예수님. 그분의 곁에는 이 사건을 전할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예레미야 7:31, 마태복음 15:3-11, 19-27, 마가복음 7:27-29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성경 원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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