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분께서 어떻게 한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생각할 때, 특정한 결합 형태나 결합 방식으로 생각하면 또 잘못된 이해로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삼위일체는 형태가 아니라, 세 분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 분은 서로 간에 어떤 관계를 가지고 계실까요? 이 또한 성경 본문을 보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4. 세 분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각자의 의견이 있으십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개역한글)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개역한글)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개역한글)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 26:42, 개역한글)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1, 개역한글)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막 9:7, 개역한글)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개역한글)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2, 개역한글)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눅 9:35, 개역한글)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개역한글)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롬 8:1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개역한글)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개역한글)
이 본문들에서 볼 수 있듯이, 세 분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각자의 의견이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이셨고, 성령님 역시 우리를 대신하여 주시는 간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성부 하나님께 보여드립니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하여 세 분이 한 가지 생각을 하고, 한 가지 의견만 내는 것은 아닙니다. 각 의견의 출처는 각자이십니다.
5. 삼위일체 이해의 첫 번째 핵심은 서로를 완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개역한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 5:20, 개역한글)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개역한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개역한글)
앞에서 말했듯이 세 분은 각자로부터 기인한 생각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을 서로가 완전히 아시기 때문에 삼위일체라는 복잡한 말이 실체를 가지게 됩니다.
위 본문들을 보면, 아버지가 하시는 모든 일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고 나와 있고, 아들(과 그가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성령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성부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나와 있습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살피시는데,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아신다고 합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이 서로 간에 안다고 나타나 있는 부분은 없지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두 분을 완전히 아신다면, 예수님과 성령님 사이에서도 서로 완전히 안다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서로 간에 완전히 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이해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면, 여기에 두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들은 각자의 육체를 가졌고, 따로 떨어져서 각자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B라는 사람이 실시간으로 완전히 다 알고, B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A라는 사람이 완전히 다 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 둘이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다른 사람’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을까요? 그들 각자가 하는 행동이 어느 한 사람의 결정대로만 이루어진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행동에는 상대의 의견 역시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서로의 생각을 완전히 알아도, 각자의 기준이 달라서 반목할 수는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서로 완전히 알지만, 하나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다음의 내용이 삼위일체 이해의 두 번째 핵심이 됩니다.
6. 삼위일체 하나님 각자의 의견은 달라도, 뜻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6-1. 예수님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시고,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르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셔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요 5:19-20, 새번역)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한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그것은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요 5:30, 새번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 8:28, 새번역)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요 12:49-50, 새번역)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요 14:10, 새번역)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요 14:31, 개역한글)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 17:4, 새번역)
* 이 부분에서 새번역을 주로 사용한 이유는 헬라어의 ἀπ’ ἐμαυτοῦ(나 자신으로부터, 내 스스로)의 번역을 ‘내 마음대로’라고 번역하는 새번역이 개인적으로 조금 더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개역 성경이 편하신 경우 해당 본문을 직접 찾아서 확인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6-2. 성령님도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듣는 것만 일러주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 16:13, 새번역)
6-3. 성령님이 알려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것을 받아서 알려 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요 16:14-15, 새번역)
여기까지만 본다면, 예수님과 성령님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성령님은 여기에 더해 예수님의 뜻에까지 맞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6-4.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 개역한글)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개역한글)
6-5.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개역개정)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개역한글)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개역한글)
6-6. 성령님께서 간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개역한글)
이런 관계가 다소 복잡하게 보일 수 있지만, 풀어서 다시 설명해 보면, ‘예수님과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시는데, 이 하나님의 뜻에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의견과 성령님의 의견이 포함되어 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누구의 의견에 더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 분의 판단 기준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세 분이 생각하시고, 판단을 하시니, 그 의견은 서로 간에 반목이 없고, 다툼이 없습니다. 다른 의견이 나올지라도 판단 기준은 하나이니, 하나의 뜻으로 모아지고, 하나의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심판하면 내 심판은 참되다. 그것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요 8:15-16, 새번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개역한글)
아까의 비유로 돌아가 볼까요? 이번에는 세 명이 있고, 세 명이 서로의 생각을 완전히 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들 중에 누군가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끼면 다른 사람들도 상대의 생각과 기분을 동시에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 다른 두 사람이 그것에 대해 어떤 의견을 떠올릴 텐데 이런 의견들 역시 이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이 즉시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면 다툼이 생길 수 있지만, 이 세 사람은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가치관이 동일합니다. 그들은 한 가지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 상황을 실제로 겪고 있는 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결정을 하고 행동하겠지만, 그 결정과 행동에는 다른 둘의 생각과 판단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기준 하에서 셋의 의견이 하나가 되어, 그 의견에 따라 한 가지 행동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 세 사람이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들을 다른 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들의 의견과 행동이 하나로 이어지기에 그것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이들은 세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나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최대한 비유를 들지 않고 설명해 보고 싶었지만, 그건 제 능력 밖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굳이 특정한 결합 형태로 생각하지 않아도,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고, 세 분은 서로를 완전히 알고, 세 분이 각자 다른 의견을 내실 수는 있지만, 결국 판단 기준은 동일하기에 하나의 의견과 행동으로 표현된다.”
저는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 상호침투, 상호보완)라는 표현을 이렇게 한 번 설명해 보았습니다. 물론 언제나처럼 이런 설명을 그대로 믿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만 하게 되셔도 저는 충분히 만족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때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6-7. 다 아는데, 모르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개역한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개역한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오는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 제가 설명드렸던 모든 것이 다 틀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단 하나, 해결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재림의 그날이 완전하게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관점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싶으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제 설명을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결정론적으로 세상을 보면, 재림의 그날까지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해져 있지 않다는 관점으로 보아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시니 재림의 그날이 정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 말이 무조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께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속성도, 능력도, 계획도 아닌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 있어서 무엇이 가장 우선시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처음 느끼게 된 문제입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한다.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또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그 제단 위에 놓여 있는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한다.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요,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또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 23:16-22, 새번역)
저는 태어날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나이를 먹고 머리가 커질수록 이해되지 않는 성경 내용들을 보면서 많은 의심이 생기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신학 서적과 교리들을 설명하는 글을 읽으면서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이 들 때, 이 말씀을 다시 접했고,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하나님은 이래야 하는 것이 맞지 않냐고 따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전지전능하시고, 시간 위에 존재하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속성을 가지셨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기에 종속되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을 잠시 포기하시고, 이 땅에 한계를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자유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시간 위에 계시지만, 시간 속에 들어오실 자유도 있으십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모든 것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일부러 알지 않으실 자유도 있으십니다. 혈루병 여인이 옷을 만졌을 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실 때처럼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그 어떤 속성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의 의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니,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 하면서 우리의 잣대로 들이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금과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 제물과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질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면, 하나님의 계획보다, 그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고백하는 것이 어쩌면 더 바른 관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조차 바뀔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의지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계실 테니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 새번역)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있는 그 의지로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다시 재림과 종말의 시기로 돌아가 보면, 결정론적인 시각으로 하나님께서 어떠한 계획을 미리 정해놓으셨다고 생각하거나, 전지에 관한 관점으로 하나님이 미리 정하시진 않았지만 이미 그날을 알고 계신다고 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시기를 본인의 의지로 정하시고 바꾸실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날과 그때는 아들도 모른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께는 그날을 정하실 자유가 있으시니, 미리 정해졌다 할지라도 아들은 확실하게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정해지진 않았지만, 미래를 보고 안다 할지라도, 그날이 되기 전에 실행하실 자유 또한 있으시니, 아들은 알지만 모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 대해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종말이 오게 하실 수도 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답은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은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무슨 전지전능한 하나님인가 하고 생각하시겠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렇게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아직 존재조차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미리 아신다 하시더라도, 그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몇 달 뒤의 월급이 뻔히 보이니, 그 돈은 충분히 기대할 수 있고 나중에 실제로 받을 돈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그 돈 때문에 정작 지금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돈을 포기해서라도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 돈은 우리의 삶에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고, 값진 진주와도 같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들을 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아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을 다 포기해서라도 그것을 가지시겠다는 것이죠.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무슨 근거로요?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개역한글)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잣대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 때가 언제인지를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사정은 여행하는 어떤 사람의 경우와 같은데, 그가 집을 떠날 때에, 자기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녁녘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무렵일지, 이른 아침녘일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막 13:32-37, 새번역)
종말의 날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시고, 깨어서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하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와 관련된 성경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7. 우리 안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개역한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개역한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개역한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개역한글)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요일 2:24, 개역한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개역한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신 것은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곧 자신이 그 사람에게 가서 함께 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냐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데, 그 성령님 안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과 동일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에베소서의 말씀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자연스레 이해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4-35, 개역한글)
우리가 진짜 신은 되지 않겠지만, 우리 안에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상황을 신이라 표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불리는 것은 우리가 육체를 벗고, 완전히 새사람으로 거듭났을 때의 일이겠지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개역한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사는 방법은 결국 우리의 욕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의 삶이겠지요. 완전한 순종이 못 되어도 괜찮습니다. 완전을 꿈꾸다가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기억하면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각자의 삶의 십자가에 잘 달려 있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라고 불러 주시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써 완전을 향해 가는 부족한 인생으로서 말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개역한글)
우리가 우리 안의 변하지 않는 악함을 보며, 여전히 죄책감 속에 하루하루를 살게 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개역개정)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역시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인정하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하루하루 키워나가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