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 15:21-22, 새번역)를 바탕으로 한 교리입니다.
바울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다고 말하는데, 그 한 사람이 바로 아담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개역한글)라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뱀의 말에 속아 여자(하와)에 이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됩니다. 이 일로 사람에게 죄가 들어왔고, 이후의 모든 사람에게도 죽음이 오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원죄 혹은 원죄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개역한글)와 같은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사람은 누구나 죄가 있기에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이 원죄라는 단어는 들어보신 적이 있을 정도로, 원죄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교리입니다. 하지만 종파나 교단, 신학자에 따라 설명이 다른 것도 사실이고, 어떤 설명을 따르더라도 우리가 이것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원죄는 아담과 하와의 죄 또는 죄의 결과가 우리에게도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가 지은 적도 없는 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느껴져 거부감을 줍니다. 이런 이유로 원죄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거나,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믿으면 다 믿어진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본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원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오죽하면 신학자들도 각자 조금씩 다르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원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은 안 될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사건을 잘 살펴보면, 완전하고 완벽한 설명은 어렵더라도 논리적으로 납득 가능한 수준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원죄를 이해하게 되면,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여러 가지 내용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원죄를 이해하려면, 처음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위의 창세기 2:16-17에서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내용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입니다. 보통 선악과와 함께 생명나무도 금지된 것이었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처음에 금지된 것은 오직 선악과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악과가 의미하는 것은 본문 그대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은 원죄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죄가 없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죄의 판단 기준은 지난번에도 말했듯 하나님 자신의 기준입니다. 이 말은 곧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준을 지키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 2:19에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장면에서처럼, 사람들은 이미 자유의지로 판단하고 행동했었기 때문에, 이전에 그들이 무슨 행동을 했든 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등장합니다. 이 나무가 그곳에 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뱀이 유혹하는 장면에서조차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말을 쓰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미 말했듯이 사람들은 자유의지로 판단하고 있었음에도 죄가 없었습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인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이들에게 죄가 생겼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고 스스로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됨으로써 죄가 오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한 행동을 통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개역한글)
하나님은 이들이 벗은 것에 대해서 죄라고 판단하지 않으셨는데, 그들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들의 두 번째 판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8-10,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실 정도로 이전에는 하나님을 피한 적이 없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이와 같이 원죄란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며 죄를 지을 수 없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 각자의 기준으로 선악을 따지며 결국 죄를 짓게 된 것을 말합니다. 만약 이것이 원죄 혹은 원죄의 결과라면, 우리 중에 어느 누가 이 죄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고자 하겠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기준을 알려주신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알려주신 율법조차 사람들이 부족한 것을 알기 때문에 감하여 주신 경우(마 19:8)도 있기에 그 기준대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짓지 않고 산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마 5:27-28). 그리고 율법을 완성하시고 새 계명을 주신 것처럼 이 기준 또한 달라지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기준이 달라진 게 아니라, 하나님이 더 많이 포용해 주시기로 했다는 것이 맞겠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확실한 하나님의 기준을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는 판단이나 행동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죄를 지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서 판단하는 이 원죄의 영향 아래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원죄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원죄의 결과인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지 않아서 짓는 원죄 그 자체로서도 말입니다. 원죄의 사건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버렸다는 상황에 집중한다면 이러한 설명도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스스로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판단에 따른 행동으로 사람들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그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니, 결국 어느 누구도 정죄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사람은 평생 단 한 번의 죄만 지어도 죄인일 수밖에 없으니, 이 세상 어느 누가 이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이 관점에서 본다면 원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 원죄를 거부할 사람 역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창 6:5-6, 새번역)
하나님의 기준을 되찾지 않는 한, 사람은 누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 *
원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면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 여자(하와)가 한 판단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개역한글)
그녀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 이미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 이들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던 사람들이었기에 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잘못된 판단을 합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실 이 문제도 그녀가 지금 누구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건지를 보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개역한글)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뱀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원죄를 짓기 전에 이미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알던 그녀가 어떻게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냐는 생각이 드시나요? 우리의 경우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옳다고 배워오고, 들어온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와서 말합니다. “너의 생각은 잘못이야. 그 상황은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아.” 이 말을 듣고 우리는 그 말을 들을 수도 있고, 안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기준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기준을 알았지만, 판단은 자유의지로 했습니다. 원래 그랬습니다. 그전까지는 오직 하나님의 기준만 알아서 죄를 지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뱀의 기준도 알게 되었으니, 그중에서 자유의지로 취사선택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안다면 잘못된 기준조차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해서 다 그대로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다른 기준들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는 한 가지 판단 기준만 있었지만, 또 하나의 판단 기준이 추가되었고 그녀는 그중에서 선택한 것뿐입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았지만, 하나님 자신은 아니기에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녀가 뱀의 기준을 듣기도 전에 한 말 또한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 개역한글)
이 말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미묘하게 달라서, 원죄의 사건이 그녀에게 문제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잘못된 대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말대로 행동해도 죄를 짓게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녀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들은 내용을 완벽하게 똑같이 전하지 못하는 우리 또한 문제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녀 또한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창 1:31). 하나님은 완전한 또 하나의 존재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완전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개역한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개역한글)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요 14:23, 새번역)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완전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처럼 말입니다.
* * *
마지막으로 원죄에 대한 이러한 관점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내용에 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원죄 없이 태어나셨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죄를, 유전자를 통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죄성 같은 것으로 이해할 때는 예수님에게 원죄가 없으려면, 성모 마리아도 원죄가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 원죄가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려면 성모 마리아의 부모도 원죄가 없어야 하고, 그 부모의 부모까지 다 원죄가 없어야 되는 것이 맞습니다. 원죄는 유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기에 카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에게 한정해서 원죄가 없다고 말하고, 개신교는 이런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원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제가 말한 관점으로 다시 예수님의 원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원죄를 사람이 스스로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나중에도 말하겠지만,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 중 한 분으로서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준은 곧 하나님의 기준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예수님이 무언가를 죄라 판단하시면 그것은 죄이고, 죄가 아니라 판단하시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육신에 원죄로 인한 영향이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과는 무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준을 사용하시는 이상, 예수님께는 애초에 어떠한 죄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한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그것은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요 5:30, 새번역)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심판하면 내 심판은 참되다. 그것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요 8:15-16, 새번역)
이런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성모 마리아에게 원죄가 있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원죄란 유전되는 죄악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을 위해 다른 누군가를 거룩하게 만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