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떠난 뒤로, 엘리사벳은 남편 사가랴와 함께 엔 케렘에 숨어 살고 있었다. 집에서 일해 주던 사람도 다 떠나보내고, 늙은 나이의 두 사람만 생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남편이 왜 그렇게 둘만 지내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이 써준 글을 보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메시야를 맞이할 백성을 준비하는 아이라니. 그 말이 어딘가 잘못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헤롯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자신도 뼈저리게 경험해 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남편의 말이 처음부터 믿어졌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확신에 찬 남편의 표정과 달라진 태도를 보며, 성소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묵상했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도 천사를 보내주시면 쉽게 믿을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보내주시지 않는 이유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남편의 말을 일단 믿고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배가 불러 갈수록 점점 버거워졌다. 남편이 열심히 도와준다고 하지만 평생 집안일을 하지 않던 사람이기에, 가끔은 차라리 가만히 두는 게 낫겠다 싶은 적도 많았다. 자신이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어떻게든 혼자 해보겠지만, 나이가 드니 조그만 집에서 살림하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이 나사렛에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사렛에 사는 마리아네 가족은 자신과 가까운 친척이었는데, 거리가 있어서 자주 왕래는 못했지만, 종종 연락하며 지냈었다. 그들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었는데, 도움을 준다고 해도 항상 거절하곤 했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사건을 주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면서, 그 의미를 찾기 전까지는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면서 말이다. 최근에 몇 달 동안 연락이 끊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리아의 아버지가 크게 다쳐서 고생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섭섭한 마음이 제법 오랫동안 가기도 했었다. 자신에게 이야기했더라면 어떻게든 도와줬을 텐데, 그들은 이전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겠다고 자신에게조차 비밀로 한 채 그 힘든 시기를 견뎠던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을 통해 마리아의 남편감을 찾았다고 하니, 어쩌면 그들의 선택이 옳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리아의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은 정말 복을 듬뿍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얼마나 괜찮은 신붓감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마리아는 정말 믿음이 좋은 아이인데, 거기에 성격도 좋고, 집안일은 물론이거니와 요리까지 잘 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까지 커서, 곤경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도움을 주는 게 그 아이다. 아버지가 다쳤을 때 했던 행동들만 들어봐도 그 아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런 마리아인 것을 알기에 자신은 이번에 나사렛에 사람을 보내어, 그 아이를 잠시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몇 년 전에 나사렛을 방문했을 때는 방글방글 웃는 모습이 마냥 귀여운 소녀였는데, 이제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어엿한 숙녀가 다 되어 있겠지? 그 모습을 하루빨리 보고 싶다.
엘리사벳이 들뜬 마음으로 마리아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 역시 하루가 다르게 자라갔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매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묵상해 갔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무언가 행동을 취하시리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가랴가 밖에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간 사이, 드디어 마리아가 도착했다. 엘리사벳은 문을 열고 그토록 기다리던 마리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리아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눈망울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엘리사벳은 그녀의 눈물을 보며 왠지 마음이 안쓰러워졌다.
“우리 마리아, 이제 예쁜 아가씨가 다 됐구나.”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엘리사벳은 그동안 마음고생을 얼마나 심하게 했길래 이렇게 힘들어할까 하면서, 들썩거리는 마리아의 작은 등을 아무 말 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마리아는 진정이 되었는지 눈물을 그치고, 엘리사벳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임신하셨네요.”
“그래, 마리아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단다.”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고맙구나.”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배를 신기한 듯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움직여요.”
“네가 오고부터 움직임이 많아졌구나.”
손바닥으로 아이를 느끼던 마리아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마리아야. 무슨 일 있었니?”
엘리사벳의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면서도 마리아는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걱정하지 말고 다 털어놔도 된단다.”
다시 한번 이어진 진심 어린 목소리에 마리아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사렛에서 있었던 일을 들으면서 엘리사벳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성전에서 남편이 들었던 예언과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메시야를 맞이할 백성을 준비하는 자신의 아이와 메시아가 될 마리아의 아이. 성소에서의 일을 다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던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하는 이야기가 진실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역사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지금까지 인사도 안 하고 있었네요. 사랑하는 엘리사벳. 저 왔어요. 잘 지내셨죠?”
마리아의 인사말이 엘리사벳의 귀에 들렸을 때, 배 속의 아이가 기쁜 듯이 몸을 움직였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큰 소리로 외쳤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고,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구나. 내 주님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일까? 보아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 아기가 태중에서 기뻐하며 뛰어놀았구나. 주님의 말씀을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으니,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마리아는 갑작스러운 엘리사벳의 말에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환한 표정을 지으며 기쁘게 말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함은, 그가 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후로는 만세에 저를 복이 있다 일컬을 것이니, 능력 있으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그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를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습니다.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행하실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리아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성소에서 천사를 만난 남편과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 그리고 지금도 느껴지는 아이의 반응. 자신에게 직접 천사가 말을 전해주지 않으면 어떤가? 이미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온 지금은 분명 깨달아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배 속에 있는 아이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메시야. 이 두 가지 증거 이상의 어떤 증거가 필요할까? 하나님은 진정으로 옳으신 분이시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기 직전까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리아의 배도, 아는 사람이 보면 살짝 눈에 띌 정도로 불러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그녀의 가족과 남편이 될 요셉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보시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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