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루터기

나무의 그루터기 너머로 보이는 산맥. 그 위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뜰에서는 찬양대를 맡은 레위인들이 아침 분향에 맞춰 찬양을 준비하고 있었고, 제사장의 뜰에는 아비야 조에 속한 삼십 여명의 제사장들이 나와 있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사가랴에게 여러 제사장들이 왜 그렇게 피곤해 보이시냐고 물었지만, 사갸라는 슬쩍 웃고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아비야 조의 모든 제사장들이 모이자, 그들은 제비를 뽑기 위해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건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몇 번의 제비뽑기를 통해 각자의 직무가 결정되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제비를 뽑은 제사장들이 제단을 청소하고, 제단에 사용할 불을 준비하고, 성소의 분향단과 촛대를 손질하게 된다. 이들이 나가고 나면 날이 완전히 밝았는지를 확인한 후, 다시 제사장의 뜰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오전의 상번제를 지내게 된다.

 오전 9시, 성소의 문이 열리고 성소 내부를 가리고 있는 바깥 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 이스라엘의 뜰과 여인의 뜰을 가르고 있던 문이 열리자, 기도를 드리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비에서 뽑힌 두 명의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 그 사이 번제로 드릴 흠 없는 어린 양이 제단 앞에서 도살되었고, 그 피는 번제단에 뿌려졌다. 성소에서 두 제사장이 분향단과 촛대를 손질하고 심지와 기름을 보충하는 동안, 다른 세 명의 제사장은 죽임당한 어린 양을 제단에 올려 소금을 뿌리고, 소제와 관제를 그 옆에 올려놓았다.

 엄숙한 마음으로 모든 과정을 지켜본 제사장들은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제비를 뽑기 위해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이 중 세 번째의 제비는 성소에 들어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인 분향을 하는 직무를 뽑는 것이었기에 무엇보다 중요했다.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기 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전해주신 십계명과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문 쉐마를 낭송했다. 그다음 이전에 한 번이라도 뽑혔던 사람은 제외하고, 남은 사람들끼리 제비를 뽑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가랴는 그 오랜 세월을 제사장으로 살아왔지만, 한 번도 분향을 해보지 못했다. 자식을 가지고 싶다는 꿈과 함께 한때는 분향하게 해달라는 것이 그의 꿈인 적도 있었다. 이번엔 자신이 뽑히게 될까, 아니면 이번에도 뽑히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 뽑히더라도 지금의 이런 기분으로 분향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선택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보여주실 것이다. 

 사가랴의 차례가 되자, 그도 손을 들어 제비를 뽑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그가 분향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사가랴는 깜짝 놀랐지만, 노련한 제사장답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는 평소에 좋게 보던 두 명의 제사장을 데리고 성소로 향했다. 함께 나온 두 명 중에 한 명은 주님께 바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향을 채운 금 대접을 들었고, 다른 한 명은 금 삽을 들고 번제단에 올라 타오르고 있는 숯을 퍼서 내려왔다. 성소로 향하는 세 명의 제사장 양편으로 두 번째 제비를 뽑았던 제사장들이 호위하듯 걸어갔다.

 그 사이 네 번째 제비를 뽑고 나온 나머지 제사장들도 각자의 자리에 서서 번제를 드릴 준비를 마쳤다. 세 명의 제사장이 성소 앞 계단에 오를 때 연주가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의 뜰에 모여 있던 이십 여명의 레위인 찬양대들이 계단에 올라 줄을 맞추었다. 사가랴와 함께 들어간 두 명의 제사장은 분향단에 숯불을 깔고, 금 대접을 옆에 올려놓은 뒤 밖으로 나갔다. 이제 성소에 남은 것은 오직 사가랴 뿐이다. 

 사가랴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평생 처음으로 해보는 분향.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기도. 사가랴는 금 대접에서 향을 꺼내 분향단 숯불 위에 올려놓았다. 분향단에서 타오르는 향연이 성소 안을 가득 채웠고, 이내 성소 휘장 밖으로 퍼져나갔다. 제사장 대표가 신호를 하자, 여인의 뜰에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에 손을 올리며 마음속으로 쉐마를 암송했다. 성소에 있던 사가랴도 같은 기도를 드리고, 십계명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지니라.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분향하는 동안, 사가랴의 마음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실망감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평생을 꿈꾸던 분향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또 다른 기도 역시 들어주실 수 있지 않을까?

 주님, 주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니 저에게 평안이 없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소원이었던 분향을 하게 되니, 그 마음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지난 세월은 쓴 쑥과 쓸개즙을 먹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고, 그 시간을 되돌아 생각해 보면 울적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은 끝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함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너무도 큽니다. 주님이 저의 모든 것이고, 저의 희망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기다리고,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께서 저를 이 고난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젊은 시절부터 멍에를 짊어지었고, 오랜 세월 잠자코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조롱 섞인 말을 들으면서 어떠한 분노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이런 저를 버려두지 않으시길 원합니다. 주님이 저를 근심하게 만드셨지만, 또한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믿습니다. 제가 근심했던 시간들은 주님의 본심이 아니실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되고, 억울한 일을 겪는 이 모든 상황을 주님이 다 보고 계실 줄 압니다.

 저의 불평과 불만에서 돌이켜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여. 주께 손을 들어 기도하길 원합니다. 제가 주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고, 주님이 제게 노하셔서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구름을 두르셔서 저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저희를 사람들에게 모욕받는 인생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입을 열어 놀려대니, 저희에게 남은 것은 눈물뿐입니다. 이 눈물을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날을 기다립니다.

 주님, 사람들이 놀려대는 말을 들으면서도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오직 주님께만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못 들은 체 하지 마시고 건져주세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응답하신 것처럼 제 간구에도 응답해 주세요. 주께서 저희가 당한 억울한 일들을 보시고, 바른 판결을 내려주세요. 

 사가랴의 고개가 저절로 숙어졌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숯불 위에서 타오르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의 향이 그의 얼굴을 가렸을 때, 꿈결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가랴야.”

 응? 누가 자신을 부르는 것일까? 성소 밖에 대제사장이 왔을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누구도 성소 안에서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놀란 사가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분향단 오른쪽, 지성소를 가린 휘장 앞에 한 빛나는 사람이 서 있었다.

 “사가랴야. 무서워 말라. 주님께서 너의 간구함을 들어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할 것이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님보다 앞서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사가랴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토록 기도 응답을 원하던 자신이 스스로 환상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일까? 사가랴는 팔뚝을 꼬집어보았다.

 “아야.” 

 사가랴는 너무 아픈 나머지 꼬집힌 자리를 바라보았다. 붉게 변한 피부 옆으로 나이 들고 탄력을 잃은 팔뚝 살이 보였다. 이제는 검버섯까지 피어난 팔을 보자니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이런 몸으로 아기를 안을 수나 있을까? 주님 왜 이제야 응답하셨습니까? 왜 좀 더 빨리 응답해 주시지 않았나요?

 “제가 이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늙었고,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기도 응답이었지만, 사가랴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원망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하더니,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러 온 천사에게까지 똑같이 대해버린 것이다.

 쏘아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천사의 얼굴을 보고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왕 해버린 말 뭐가 어쩌랴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오기였다. 그렇게 기도할 때는 들어주지 않으시더니, 다 늙은 이제야 응답을 주셨다.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다.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나를 보내셨다. 보아라.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서 능히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라.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질 것이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 변명하듯 대답하려 한 사가랴였지만, 그의 입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천사는 사라졌지만, 그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당황한 채 허둥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소 밖 제사장의 뜰에서 사가랴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분향이 끝나고 연기가 잦아들면 촛대를 닦았던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손질하지 않았던 나머지 촛대 심지를 갈고 기름을 채우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성소의 연기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다른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성소에 들어가야 할 제사장은 대표 제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며 기다려보라는 눈치를 주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렀지만, 성소에 들어간 사가랴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대표 제사장은 촛대를 닦았던 제사장에게 다시 눈치를 주어 성소에 들어가게 했다. 그가 성소에 들어가서 본 것은 목에 손을 대고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가랴의 모습이었다. 그는 재빨리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마친 뒤, 사가랴를 부축해 성소 밖으로 나왔다. 오늘 성소에 들어갔던 나머지 세 명의 제사장이 다가와 그들의 옆에 일렬로 섰다.

 다섯 제사장이 뜰 중앙으로 걸어 나왔고, 그들을 중심으로 네 번째 제비에 뽑혀 번제단에 오른 제사장을 제외한 모든 제사장들이 정렬했다. 이쯤에서 분향했던 사가랴가 두 손을 들고, 큰 목소리로 축복문을 낭송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제사장들이 따라서 낭송하면서 남은 절차들이 진행되는데, 그 시작을 해야 할 사가랴는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없이 서 있었다. 제사장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의아한 감정이 떠올랐다. 사가랴를 부축하고 나온 제사장은 눈치를 보다가, 사가랴 대신 축복문을 낭송하게 시작했다. 조금 절차가 달라졌지만, 어찌 되었든 번제가 시작되었다.

 번제단의 제물이 불타오르고, 그 위로 소제, 관제가 부어지자, 레위인 찬양대가 악기의 연주에 맞춰 시편의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 소리가 성전 밖으로 들리면 예루살렘 주민들도 아침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  *  *


 “대제사장님, 오늘 일어난 사건 들으셨습니까?”

 “사가랴 이야기 말인가?”

 “그렇습니다. 성소 안에서 뭐에 놀랐는지,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고 합니다.”

 “성소 안에 놀랄 것이 뭐가 있는가. 거기에 있는 거라곤 분향단, 촛대, 진설병 상 같은 것뿐이지 않은가. 사가랴가 지성소 휘장을 열어젖힐 사람도 아니거니와 지성소를 열어봤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데.”

 “환상 같은 걸 본 게 아닐까요?”

 “우리는 사두개인이네.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것들을 믿었다고 환상 타령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상 같은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성전과 제의, 그리고 우리의 선택일 뿐일세. 아침 사건도 옆에서 잘 마무리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행동인 거야.”

 “그거야 그렇지만….”

 “사가랴 일은 내가 따로 물어보겠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에겐 말해줄 걸세.”


*  *  *


 사가랴는 분향을 마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계속 몸이 떨렸지만, 천사의 말을 떠올리자 금세 마음이 진정되고 기분이 좋아졌다. 하나님은 오늘 자신이 꿈꾸던 두 가지 일을 모두 이루어주셨다. 비록 목소리를 잃기는 했지만, 이 또한 영원한 것은 아니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기쁨을 누리던 사가랴는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자신이 왜 목소리를 잃어야 했을까? 일차적인 이유로는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려서일 것이다. 천사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으니 이렇게 되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일까? 그 옛날 아브라함과 사라 역시 늙은 자신들에게 아이가 있을 것이란 천사의 예언을 믿지 못하고, 속으로 웃기까지 했다. 모든 유대인의 조상이고, 믿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그가 그랬다면 자신의 믿음 없음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사가랴는 골똘히 생각했지만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일으켜 문을 열자, 웃음 띤 대제사장의 얼굴이 보였다.

 “이보게, 사가랴.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이렇게 와보았네.”

 사가랴는 몸짓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라 청했다. 대제사장은 방에 들어와 의자에 앉았고, 사가랴도 맞은편에 앉았다.

 “왜 갑자기 이러는가? 잠시 몸이 안 좋은 거라면, 내가 왕후께 부탁해서 좋은 의사를 찾아보겠네.”

 사가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면 정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지금 자네가 성소에서 환상을 보았느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설마 그건 아니겠지?”

 사가랴는 몸을 일으켜 서판을 가져왔다. 그렇게 글을 쓰려는 순간 문득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말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제사장은 그의 입장상 천사를 믿을 수도, 믿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사두개인인 대제사장이었다. 그리고 혹시 자신의 말을 믿어준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전하면 그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는 헤롯의 장인이었다. 헤롯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일까?

 사가랴는 서판에 글을 썼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제사장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사이에까지 이럴 필요는 없는데.”

 [아직 제 마음속에서도 정리가 되지 않은 일이라…. 양해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네, 자네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그때엔 꼭 이야기 해주어야 하네. 일단은 몸을 잘 추스르고 있게나.”

 대제사장이 밖으로 나가자, 사가랴는 자신의 머리를 탁 하고 쳤다. 이제야 천사가 왜 자신의 입을 다물게 했는지 숨겨진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아이가 생길 기쁨에 생각 없이 이 사건을 떠들어 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두개인 제사장들이 멀쩡히 버티고 있는 이 성전에서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또한 주께서 오는 길을 맞이할 백성을 만든다는 것은 곧 메시야가 오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을 헤롯 왕조를 흔드는 사건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당장 대제사장 시몬도 헤롯 왕가의 존속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 소문이 잘못 퍼지기라도 한다면, 자신과 자신의 아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어긋나게 하는 것일까?

 사가랴는 이제야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였을까?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하는 사가랴를 보고 주변에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왔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인 고위 제사장들 사이에서는 나이가 많은 그의 몸이 잠시 나빠진 것이라는 현실적인 결론이 내려졌다. 사두개인에 속하지 않은 일반 제사장들과 레위인,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가 성소에서 환상을 본 것이란 말도 돌았다. 하지만 뒤에서 쉬쉬거리며 이야기할 뿐, 대놓고 앞에서 말하지는 못했다. 

 사가랴는 이 이야기들 사이에서 침묵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제대로 수행했다. 사람들은 그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상황에만 집중할 뿐, 그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졌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사가랴는 당번 기간이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했고, 둘은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산지에 있는 엔 케렘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  *  *


 사가랴는 잠든 아내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니,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부유한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제사장으로 살아왔다. 아내인 엘리사벳과 결혼한 이후, 자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너무나 좋은 기억들뿐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자신과 아내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아왔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동안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싶다. 이렇게 행복한 시간들이 많은데, 왜 자신은 인생의 밝은 면은 보지 못하고, 어두운 면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나마 감사한 것은 고난이 계속될지라도, 아내는 여전히 당당한 모습으로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고, 자신은 점점 퉁명스러워졌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기도만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자신이 기도를 멈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을까? 무엇이라 속단할 수는 없지만, 지금처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내가 처음 임신 사실을 알고, 눈망울 가득히 눈물을 머금고 말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떠오른다.

 “주께서 저를 돌아보시어, 사람들 사이에서 제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해주셨습니다.”

 자신도 힘들었지만, 아내 역시 그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자신은 아내 탓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아내는 온전히 스스로를 탓해야 했으니 그 아픔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잘 견뎌준 아내가 너무나 고마웠다. 사가랴는 아내와 자식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다 하리라 다짐했다.

 이제는 늙어 힘도 없고, 앞으로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 자신이지만, 그런 현실에 절망하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주님의 길을 예비할 아들을 보내주셨다. 그 아들을 올바로 양육하는 시간은 자신이 살아온 지난 모든 세월보다 더 값진 것이리라.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이루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젊은 시절의 자신이라면 결코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을 지금은 가르칠 수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기에 기다림의 삶을 가르쳐 줄 수 있고, 수많은 나날들을 불만으로 채워왔던 자신이기에 진정한 회개를 가르칠 수 있다. 이렇게 문제 많고 부족한 삶을 살아온 못난 자신이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사가랴는 먼 산 너머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아직 자신에게 남은 그루터기가 있음을 깨달았다. 온 세상을 빛으로 채웠던 태양이 지면, 달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빛나는 시절이 없으면 어떤가?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길을 비춰주는 인생 역시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다. 사가랴는 점점 밝아져 가는 달을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 힘들어했던 사가랴의 상실감을 잘 알고 계셨고, 그 이상으로 깊이 이해하고 계셨다. 그러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인 세례 요한을 키우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연단을 거쳐야 했다. 자신의 고집과 성품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말해야 하는 삶. 인간으로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 길을 가는 것이 세례 요한의 임무였고,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이었던 것이다.

 이제 사가랴는 사랑하지만 퉁명하게 표현되었던 그의 말 대신, 사소하지만 깊은 사랑이 담긴 행동으로 아내를 아껴주고 자녀에게 표현할 것이다. 아들인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없이 살게 되는 이 시간을 통해, 사가랴는 삶으로 보여주는 인생을 배워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사가랴의 목소리를 가져가신 또 다른 이유였다.


본문에서 사가랴가 낭송한 쉐마와 십계명은 개역 한글에서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까지와 출애굽기 20장 3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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