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님.”
다가오는 대제사장 시몬을 보고, 젊은 제사장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대제사장님 오셨습니까.”
뒤이어 사가랴 역시 대제사장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
“다음 성전 봉사가 아비야조라 해서 나와 봤다네. 자넨 여전히 정정하구먼.”
대제사장은 사가랴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이제는 저도 많이 늙었습니다.”
“자네가 늙었다는 말은 이제 안 믿기로 했네. 그 말을 들은 게 벌써 5년은 넘은 거 같아. 자넨 아마 나보다 더 오랫동안 제사장을 하고 있지 않을까? 허허.”
오랫동안 친우로 지낸 사가랴를 보는 대제사장의 눈은 따스한 미소를 띠었다. 사가랴 역시 그런 그를 보며 굳어 있던 얼굴을 폈다.
“어때 아직도 소식이 없나?”
하지만 이어진 대제사장의 말은 다시 그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사가랴는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쯧쯧. 그러게 예전에 내가 한 말을 들었어야지. 고집부리더니 이게 뭔가.”
사가랴의 표정이 더욱더 굳어져 갔다. 영문을 모르는 젊은 제사장은 대제사장 시몬과 사갸라의 얼굴을 보며 어느 분위기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저는 이대로 살렵니다. 그나저나 왕후님은 잘 지내십니까?”
“그럼, 우리 왕후께서는 언제나 잘 지내신다네.”
“다행입니다. 요즘 궁궐 분위기가 심상찮아서 걱정되었습니다.”
“우리 왕후님과 빌립 왕자께서는 헤롯왕의 사랑을 받고 계시니, 지금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아무 걱정이 없다네.”
“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왕후님과 왕자님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고맙네. 아무튼 자네는 정말 생각 없는가? 내가 자네를 위해 최선을 다해 찾아줄 수 있는데.”
“저는 지금으로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만족은 무슨. 자네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게 나 아니겠나?”
대제사장의 말에 사가랴는 예전에 대제사장을 처음 만난 때가 떠올랐다. 대제사장 시몬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제사장인 보에투스의 아들이다.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이주했는데, 오자마자 당대 최고의 미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그의 딸에 대한 소문이 온 예루살렘에 퍼져나갔다. 소문을 들은 헤롯은 그녀의 미모에 반해 결혼하려 했지만, 시몬의 가문이 왕과 인척을 맺기에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수준도 아닌 애매한 위치인 게 문제가 되었다. 헤롯은 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해 귀족이 되게 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했고, 그렇게 갑작스레 시몬은 대제사장이 되고, 그의 딸인 미리암네 2세는 왕후가 되어버렸다.
시몬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평생을 살아왔기에 예루살렘의 상황에는 익숙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가랴가 예루살렘 및 성전에 관한 안내를 맡게 되었다. 마침 두 사람의 집이 근처였고, 연배도 비슷했기에 그들은 이내 친해져 이후로도 그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 대제사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사가랴였고, 사가랴의 속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대제사장 시몬이었다. 사가랴가 자녀가 없어서 힘들어하는 것을 대제사장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는 오래전부터 사가랴에게 재혼을 권유하고 있었다.
“내가 자네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않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이혼 증서를 써서….”
“대제사장님.”
화난 듯 상기된 목소리.
“저는 정말 지금 이대로 만족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닌 그 어느 누구와도 부부의 연을 맺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조금 늦은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가랴는 대제사장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이스라엘의 뜰 안으로 들어갔다.
“쯧쯧쯧. 저놈의 고집불통 영감 같으니라고. 이게 다 자기를 위한 건데 왜 그걸 몰라주나.”
시몬의 말 속에는 사가랴를 향한 답답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멀어져가는 사가랴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잣말처럼 옆에 서있는 젊은 제사장에게 말을 꺼냈다.
“사가랴는 다 좋은데 저 고집이 문제라네. 내가 그렇게 충고했건만 듣지 않다가 저 모양으로 늙어버린 게 아닌가. 이젠 아무런 희망도 없으니. 쯧쯧.”
“아…. 네.”
“엘리사벳이 좋은 여자라는 건 나도 인정하네. 지금까지도 그렇게 여기저기 봉사하고 다닌다니 정말 대단한 여자가 맞아.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여자는 자고로 자식을 잘 낳는 게 최고라네. 나를 보게, 내가 대제사장이 될 줄 생각이나 했겠나? 딸 하나 잘 낳아서, 이렇게 왕의 장인이 되고, 대제사장이 되었네. 자식이 정말 우리 인생의 희망일세. 만약 사가랴가 예전에 내 말을 듣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면 그에게도 희망이 있었을 텐데, 고집부리다가 저렇게 된 거 아닌가. 쯧쯧쯧. 자네는 아직 결혼을 안 했지?”
“네! 그렇습니다.”
“자네는 집안이 별로 좋지 않으니, 아내라도 꼭 잘 고르게. 여자를 잘 만나면 자네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거야.”
대제사장의 말을 들은 젊은 제사장의 뇌리에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위 제사장 안나스의 딸.
“어디 집안 좋은 여자 있으면 꼭 붙잡게.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한번 최고가 되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옆에 서 있는 젊은 제사장에게 이런저런 말을 꺼내는 대제사장이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지만, 사가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그에게 투영되었던 것이다.
“그럼 수고하게. 가야바.”
“네, 조심히 가십시오. 대제사장님.”
떠나가는 대제사장 시몬을 바라보는 가야바의 눈에 욕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사가랴는 방을 배정받아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성전 봉사를 위해 잠을 자려 했지만,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들어 밤새 몸을 뒤척였다. 그는 새벽녘 자신을 깨우는 불침번 제사장의 손길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 지하로 내려가 미크바에 몸을 담그고 정결 의식을 시작했다.
그는 온몸이 물에 잠긴 상태에서 눈을 뜨고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물결처럼 그의 마음도 여전히 안정되지 않았다. 아내가 또다시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을 것이 예상되어서일까, 아니면 대제사장 시몬의 말 때문일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결 의식을 하는 도중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시몬의 조언처럼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게 답이었을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만약 지금 마음을 가지고 예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자신은 그대로 아내 엘리사벳과 함께 사는 것을 택할 것이다. 자식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아내인 엘리사벳에 비할 수는 없다. 어떻게 아내를 버릴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내를,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를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자 사가랴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불현듯 올라오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이 다시 한번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주님, 제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않으시니,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제 평생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제 아내 엘리사벳 역시 평생을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희에게 다 의로운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 말 그대로 저희는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지켰습니다. 저희가 이 이상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저희에게 허락하신 것은 상처를 주는 말들과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가라는 말뿐입니다. 아이를 주시지 않겠다 작정하셨으면 그냥 그대로 살게 할 것이지, 왜 이런 고난까지 겪게 하십니까?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 하셔서 그 말씀 그대로 지켰지만, 정작 주님은 저희를 미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 정말 저희를 사랑하시는 게 맞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가처럼 아무리 주님을 의지하려 해도 오히려 주께서 저희를 치시는 것만 같습니다. 주님이 화살을 겨누어 저의 심장에 쏘시는 것 같습니다. 그토록 살려달라고, 응답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했지만, 주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으십니다. 주께서 저의 평안을 빼앗으시니, 제 마음에는 행복이 사라져갑니다. 이제 제 입에서 나오는 것은 탄식뿐입니다. 찬란했던 젊은 시절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제게 남은 것이라곤 다 늙어빠진 몸뚱이뿐입니다. 주님께 두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갑니다. 주님…. 저희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대하십니까?
사가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다 털어놓았다. 하지만 한번 무거워진 마음은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오랜 세월 쌓여온 실망감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산사태처럼 밀려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짓눌러 버렸다.
사가랴는 가슴 속의 울분은 품은 채, 억지로 미크바를 나와 의복을 정제하고, 제사장의 뜰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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