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두개인

저자의 글

사두개파는 하스모니안 왕조 시절 일부 제사장들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예를 자처하며 만든 당파입니다. 이들은 고위 제사장들과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요한 힐카누스 1세와 바리새인 간에 대제사장직을 두고 다툼이 일어났을 때, 왕의 편에 서서 바리새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두 명의 왕이 지나갈 동안 더욱더 강한 권력을 잡았지만, 살로메 알렉산드라 통치기에 정계로 복귀한 바리새인들에게 잠시 동안 밀리기도 했습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아들이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러스 2세인데, 힐카누스 2세 편에는 바리새인이, 아리스토불러스 2세 편에는 사두개인이 붙어서 형제간의 싸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힐카누스 2세가 대제사장이 되고, 아리스토불러스 2세가 왕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헤롯의 아버지인 안티파테르가 힐카누스 2세를 부추기면서 형제간의 전쟁 제2막이 시작되었고, 두 형제는 각자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가, 결국 어부지리로 로마가 유대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헤롯왕의 시대에는 사두개인들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사두개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도 헤롯의 지시에 의해 수시로 바뀔 수 있는 존재였고, 산헤드린 공회 역시 로마의 통치 전까지는 유명무실한 조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로마의 직접 통치기에 산헤드린 공회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다시 권력을 잡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이들은 로마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헤롯의 아들인 아켈라오가 유대-사마리아-이두매의 분봉왕 자리에서 쫓겨나고 로마가 인구조사를 명령했을 때, 극심하게 반발했던 북쪽 갈릴리와 다르게 남쪽 유대가 상대적으로 순조로울 수 있었던 것도 대제사장 요아살의 설득이 있었기 때문일 정도로 사두개인의 친로마 성향은 두드러졌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대제사장 가야바, 안나스 및 산헤드린 의원들 상당수가 이들 사두개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경우에는 예수님께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사두개인들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적대자로 활동했습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사두개인의 존립 근거 자체를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오직 토라(모세오경)만 받아들이고, 장로들의 전승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언서와 성문서들에 대해서는 그 나름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결코 토라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토라에서 확실하게 뒷받침하는 신학적 개념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영혼의 불멸뿐 아니라 죽음 이후의 심판과 형벌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들이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 말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현실 중심적이었고, 운명론을 거부하고 현실의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즉, 사람이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간 자신의 선택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도 삶의 중요한 요소이기에 이러한 가치관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의 진짜 문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가 끼어들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일부만을 받아들였고,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다른 말씀들은 무시했습니다.

 이들에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전이었습니다. 사두개인 중 상당수가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성전이 없다면 그들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을 통해 벌어들이는 엄청난 수입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곳이지만, 동시에 많은 부를 가져다주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성전세를 바쳤고, 부수적으로 희생 제물의 판매 수입이나 일반 동전을 성전 세겔로 바꾸어주면서 얻는 수수료,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자를 받고 대출을 해주는 것 등을 통해서도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이런 사두개인들이었기에 나사로의 부활로 그들의 신학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발언으로 사두개인의 근간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결정적인 역할로까지 쓰이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때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이들에게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 역시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었고,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들은 토라에 나오는 율법을 어기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이유에 신성모독이 들어간 것도 그런 그들의 성향이 나타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부 말씀만 가지고 그들 각자의 생각으로 한 판단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뜻에서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 중 일부는 너무도 쉽게 세상과 타협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의 판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이들에 대해 상호 간에 약간의 적대감을 가지고 반목하는 것으로 묘사했고, 지방의 행정관으로 발령을 받으면 백성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바리새파처럼 행동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유대인들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을 때, 에세네파, 열심당과 함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성전을 통해 드려지는 희생 제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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