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를 따라 이어지는 해변 길은 갈릴리를 지나 다마스쿠스에서 왕의 대로와 만난다. 이 길을 가다 보면 중간쯤에서 헤르몬산을 볼 수 있는데, 세 개의 봉우리가 이어진 정상 부근은 일 년 내내 만년설로 덮여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산은 예로부터 거룩한 산이라 불리었는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점령한 시절에는 시온산이라 부른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의 시온산은 예루살렘의 성전산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때에는 그만큼 의미가 있는 산이었던 것이다.
요단강은 헤르몬산에 내린 눈과 비, 이슬이 석회암 속에 스며들었다가 다시 흘러나오면서 발원하는데, 그중에 두 번째로 큰 수원지가 있는 도시가 가이사랴 빌립보이다. 이 도시는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에게서 태어난 헤롯의 아들 빌립이 영토를 물려받은 후, 중건하여 수도로 삼은 도시인데,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역 중의 하나였다.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난 요단강은 훌레 호수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갈릴리 바다를 지나 사해로 이어지는데, 이 주변에는 낮은 잡목들과 수풀이 우거져 사시사철 푸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요단강은 메마른 이스라엘 땅에 생명을 주는 강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다윗이 헤르몬산의 이슬과 영생의 복에 대해 노래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그리고 지금 이 생명의 강에서 또 다른 영생의 복을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낙타 털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띤 그의 모습은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을 연상케 했다. 그는 서원한 이후 한 번도 밀지 않아 길게 자란 머리를 휘날리며,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인 그는 헤롯왕을 피해 광야로 숨은 부모님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그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사가랴는 늘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너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님보다 앞서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사명이다.”
엘리사벳도 종종 당부했다.
“주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오셨다. 너는 그분을 본 적이 없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날까지 너는 네게 맡겨진 사명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요한이 성인이 되기 전에 두 분 모두 돌아가셨지만, 그분들은 평생을 바칠 사명을 남겨주고 떠나셨다. 주님보다 앞서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 지식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 그 사명을 위해 요한은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독주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 * *
헤롯왕이 죽고,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 땅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유대와 이두매,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켈라오가 유배당하고, 로마가 직접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된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로마로 간 아켈라오는 유대에서 온 사절단들과 겨루게 되었다. 유대의 사신들은 조상에게 받은 율법대로 살게 해달라고 황제에게 청원했는데, 그들이 바라는 것은 왕정의 해체였다. 헤롯왕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그들은 처음엔 아켈라오의 즉위를 환영했지만, 성전에서 삼천 명이 죽은 사건을 계기로 로마가 직접 지배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양쪽의 의견을 모두 들은 후, 헤롯의 마지막 유언대로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는 아켈라오에게 주고, 갈릴리와 베레아는 안티파스, 그리고 갈릴리의 북쪽인 바타네아, 트라코니티스, 아우라니티스 등은 빌립에게 지배하도록 했다. 다만 가사와 가다라, 히포스 등의 헬라 도시들은 이 지역 안에 있다 할지라도 로마의 시리아 속주에 편입시켰다.
아켈라오는 유대에 돌아온 뒤, 반란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대제사장을 또다시 바꾸었다. 그는 로마군과 함께 대부분의 반란을 진압하고 관계자들을 처형했는데, 반란이 진압되었다고 해서 좋은 시절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전보다 더한 폭정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학대했다. 그의 통치가 십 년째가 되었을 때, 유대와 사마리아의 유력자들은 견디다 못해 로마의 황제에게 고소했고, 결국 아켈라오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갈리아의 비엔나로 추방되었다. 많은 사람을 죽인 아켈라오는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이후 시리아 속주에 편입된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는 기사 계급의 사람들이 지방 총독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또한 대제사장은 이전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되었고, 산헤드린 공회가 자치 기구로서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산헤드린 공회는 귀족과 고위 제사장인 사두개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평민 출신의 바리새인들은 일부만 공회원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남쪽 지방이 안정을 찾아가는 동안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북쪽 갈릴리에서는 또다시 반란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구레뇨가 시리아 속주의 총독이 되면서, 두 번째로 인구조사를 명령했는데, 대제사장 요아살의 설득 때문에 상대적으로 순조롭던 남쪽과는 달리, 갈릴리에서는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가말라 시에 사는 유다는 바리새인 사둑과 함께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 인구조사는 자신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 말하며 반란을 이끌었다. 선민의식과 민족주의를 고집하며, 극단적인 교리와 열광적인 태도를 갖춘 이들로 인해 갈릴리는 이전보다 더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열심당이라 불리는 이들은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고, 적뿐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들까지 마구 살해했다. 도시들의 약탈과 파괴도 쉴 새 없이 이어졌는데, 이때부터 지금까지 갈릴리는 민족 해방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본거지가 되어, 유대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 이전보다 더한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갈릴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남쪽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예전의 권위를 얻었다 생각되던 대제사장의 지위는 다시 로마 총독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위치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총독의 의견에 따라 대제사장이 결정되니, 돈 있고 가문 좋은 사람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총독에게 잘 보이려 온갖 노력을 다하게 되었다. 요아살에 이어 로마 총독의 눈에 띈 사람은 셋의 아들 안나스였다. 그가 대제사장이 되면서 성전의 권력도 큰 변화를 맞이했는데, 그의 가문은 이후로 아들에 이어 사위인 가야바까지 대제사장이 되는 등 예루살렘의 숨겨진 지배층이 되었다.
또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는 더 많이 벌어졌다. 오래전부터 관계가 좋지 않았던 양쪽이었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사마리아인의 성전 출입은 허용받고 있었다. 하지만 유월절이라 불리는 무교절 밤에 성전 문이 열리자마자, 몇몇 사마리아인이 몰래 잠입해 시체를 성전 회랑에 던져놓고 도망을 친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양쪽의 관계는 더욱 심각해졌고, 이후로 사마리아인은 성전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나마 무난했던 로마 총독들도 빌라도로 바뀌면서 큰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다섯 번째 총독인 빌라도는 유대의 율법을 존중했던 이전 총독들과 달리, 부임할 때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임기 첫 주에 자신이 데리고 온 부대를 시켜 황제의 얼굴이 그려진 군기를 들고, 한밤중에 예루살렘에 진군하도록 했다. 어떠한 형상도 만드는 것을 금하는 유대인들은 아침에 그 깃발이 게양된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수많은 사람이 빌라도가 머무는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로 몰려가 깃발을 내려 달라 요구했지만, 빌라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6일째가 되던 날, 빌라도는 무기를 소지한 병사들로 그들을 에워싸고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땅에 엎드려 고개를 길게 빼고는 율법을 어길 바엔 차라리 죽이라고 외치는 그 많은 사람에 질려 다시 깃발을 회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후에도 이교의 신이 새겨진 금방패를 예루살렘 서쪽 성문에 걸어놓으려는 등 온갖 핍박을 일삼는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의 시기를 겪으며,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를 염원하기 시작했다. 온건한 성향이냐, 극단적인 성향이냐에 따라 각자가 원하는 메시야의 모습은 달랐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시면, 유대 민족이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될 것이란 생각만은 공통적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세례 요한뿐 아니라, 온 세상도 메시야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요한은 광야에서 성장하며, 근처의 에세네파 공동체와도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여러 분파로 나뉘었는데, 대체로 금욕적이고, 말세 지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며, 성전 제사를 제외한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선하게 살았다. 요한은 에세네파와의 교류를 통해 의로운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부모님이 말씀하신 메시야와 연관시켜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두 명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왕으로서의 메시야였다.
요한은 부모님이 말씀하신 메시야가 에세네파 입장에서는 어느 쪽인지 궁금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이니, 왕으로서의 메시야일 것이란 결론이 났었다. 그리고 동시에 에세네파 사람들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를 더 높이 치기 때문에 왕이신 메시야가 오셔도 또 다른 제사장 메시야를 기다릴 것이란 생각 역시 들었다.
이렇듯 세례 요한 역시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들의 죄를 일깨워주고,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통해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을 마련하는 것뿐, 그 이상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 이루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디에나 다 숨어 있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들의 예언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속에도 있었다. 지위가 높은 사람뿐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셨고, 이 과정에서 선한 자만 쓰시는 것도 아니었다. 헤롯왕 같은 악한 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셨고,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계획을 하나씩 차근차근 이루어가셨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렸고, 요한은 광야를 벗어나 요단강으로 나와, 소리 높여 회개를 선포한 것이다. 그가 세상에 나온 것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황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으로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리고,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였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시편 133:3, 마태복음 3:2, 누가복음 1:16-17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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