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님. 헉헉…. 큰일났습니다.”
베다니를 염탐하기 위해 보낸 자신의 종 말고가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와 말했다.
“무슨 일이냐?”
“지금… 지금…. 헉헉….”
“숨부터 돌리고 말하거라. 뭘 그리 호들갑인 게냐.”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지금 유대에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사랑을 가르친다고 말하지만 다 헛소리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오죽하면 그와 비슷한 가르침을 가진 바리새인들마저 그를 죽이려 하겠는가?
물론 바리새인들과 교리적으로 싸워주는 것은 사두개인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넘어서는 안 되는 선까지 넘어버렸다. 부활이 없다는 믿음에 대한 도전. 바리새인들은 예전부터 역사서와 예언서를 보며 부활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런 내용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주신 토라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결코 부활을 믿지 않는데, 그가 베다니에서 한 사람을 다시 살렸다는 헛소문을 만들어서 이 교리에 도전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둔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헛소문에 휘둘릴 수밖에 없어, 베다니에 그 녀석이 왔다는 이야기가 퍼지자마자, 떼를 지어 그곳으로 몰려가 버렸다. 한심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들은 그 예수라는 작자가 메시야이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는 자기 말처럼 사람들에게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온 사람일 뿐이다. 그를 가만히 두면 유대 민족 전체가 멸망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사두개인들은 이 건에 관해서만큼은 의견이 일치하는 바리새인들과 힘을 합쳐 그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제자들과 함께 움직였고, 가는 곳마다 그에게 홀린 많은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이 헛소문의 또 다른 진원지인 나사로라는 인간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미 늦어버린 것 같다. 유월절이 오기 전에 나사로를 처리하고 싶었지만, 그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여 일이 틀어졌고, 이제는 아예 예루살렘까지 들어오고 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대제사장 가야바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집무실을 나섰다.
* * *
감람산이라고도 불리는 올리브 산 쪽 저 멀리에서부터 온 성이 떠나갈 듯 함성이 들려온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 옛날 초막절마다 제단 주위를 돌며 ‘오, 구원해 주시옵소서’,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온 마음을 다해 외쳤던 구호가 예수님을 위해 소리쳐지고 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예수님께서 이미 왕이 된 것처럼 기뻐하는 사람들. 그들이 벗어서 깔아놓은 겉옷들과 잎 많은 생나무 가지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로마는 가는 곳마다 포장도로를 만들어 제국을 힘으로 통치하는데, 그들이 만든 어떤 단단한 도로보다 이 부드러운 천과 잎으로 만든 길이 훨씬 더 강력해 보였다. 믿음으로 세운 길,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
“복되도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사람들은 종려나무, 즉, 대추야자나무 잎을 꺾어 흔들며 그분을 환영했다. 영광, 아름다움, 기쁨, 승리를 상징하는 길고 아름다운 잎으로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질 것’이란 시편의 기록을 연상하게 만드는 사람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것처럼 작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시느니라.”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대제사장 가야바는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예로부터 유월절이나 명절이 되면 많은 소요가 일어났고, 반역의 조짐도 있었다. 아켈라오가 즉위했을 때, 성전에서 삼천 명이 죽은 것도 유월절 즈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비롯한 제사장들은 명절 때마다 특별히 신경을 쓰곤 했는데, 이번 유월절은 시작하기 전부터 상황이 이렇게 꼬여 버렸다. 여기에서 자칫 잘못하면 더 큰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책임은 자신이 져야만 한다. 지금까지 로마의 총독에게 밉보여서 경질된 대제사장이 한둘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이 처신을 잘 해서 대제사장직을 유지하고 있지만, 자신도 하루아침에 잘리게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더군다나 이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황제의 얼굴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몰래 가지고 들어와 게양한다거나, 이교의 신이 새겨진 금방패를 예루살렘 성벽에 걸어 유대교를 억압하려 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수로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성전 헌금을 강제로 사용했고, 이를 반대하는 갈릴리의 순례자들을 공격해 그 피가 희생 제물에 섞여 들어간 일도 있었다. 실로암의 망대를 열심당들이 점령했을 때는 아예 망대를 무너뜨려 열여덟 명이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비록 요즘 들어 그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지만, 그는 결코 이런 일들을 그냥 넘길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도 성전 북쪽 벽 근처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의 로마군에 의해 전부 보고될 것이 분명했다.
가야바가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공회에 속한 바리새인 몇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제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안 좋으십니다.”
“괜찮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저 예수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또 무슨 일인가?”
“우리가 그에게 이 시끄러운 제자들을 꾸짖으라고 했더니, 그가 뭐라고 한 지 아십니까?”
“뭐라고 했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라고 하더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바리새인. 그의 옆에서 다른 바리새인이 탄식하듯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못 얻을 것이오.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예수가 드디어 성문을 지나 성전에 도착했다. 그를 보고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사람들과 들뜬 목소리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성전. 이를 보고 어느 누가 나서서 그를 제지 할 수 있겠는가?
* * *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소?”
유월절이 되기 이틀 전, 대제사장의 관사에 소수의 공회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대제사장의 심복이라 불릴 수 있는 인물들.
“일단은 그냥 두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냥 두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지난 며칠간 모욕을 당한 게 부끄럽지도 않소!”
두 사람의 상반된 말처럼, 자신들은 그를 그냥 두기도, 또 어떻게 처리하기도 어려운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를 그냥 둘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하는 공격적인 행동들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성전에서 희생 제물로 쓰일 동물을 파는 사람들과 다른 동전들을 성전 세겔로 바꿔주는 사람들의 상을 엎고,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도 금지시켰다.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는 이런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었다.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그것은 누가 봐도 자신과 자신의 처가인 안나스 가문을 향한 공격이었다. 장사꾼들이 자신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그때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만 없었다면 분명 큰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치솟는 화를 겨우 누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이번엔 그의 주위를 맴돌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지껄이는 아이들이 신경을 거스르게 했다.
그래서 그에게 ‘당신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소?’ 하고 한 소리 했더니, 그는 뭐가 잘났는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 너희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을 온전케 하셨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것은 대놓고 자신을 조롱한 것이었다. 토라만 성경으로 인정하는 우리에게 감히 시편의 구절을 들이밀면서, 읽어 본 일이 없냐고 묻다니. 너무 화가 나서, 백성의 장로들을 데리고 그에게 다시 찾아가 그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따져 물었는데, 그는 이딴 식으로 말하며 답변을 회피했다.
“나도 한 가지를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도 내게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해 보아라.”
하여간 머리는 좋아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해대는 녀석. 우리가 요한을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하면,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세례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흥분해서 달려들 상황이었으니 우리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그도 자기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거기까진 그래도 참을만했는데, 그는 교묘한 비유까지 들면서 우리들을 능멸하려 들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첫째 아들에게 가서, ‘얘야, 오늘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싫습니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습니다.’ 하고, 가지 아니하였다.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그 질문에 ‘첫째 아들이오.’라고 우리 쪽의 누군가가 대답하자, 그는 즉시 이렇게 공격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아라. 어떤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울타리를 두르고, 거기에 포도즙 짜는 틀을 파고, 망대를 짓고는,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노라. 열매를 거둘 때가 가까워, 그가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빈손으로 보내었노라.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려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고 빈손으로 보내었고,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그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고, 또 그외 많은 종들도 때리고, 돌로 치고, 혹은 죽인지라.
그에게는 아직 하나,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으니, 마지막으로 그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가로되,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아마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라.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되, ‘이는 상속자이니 죽이고, 그의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이고 던졌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소출을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를 줄 것입니다.”
“그렇다.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가 한 마디 덧붙인 순간, 우리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너희는 성경에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한 것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서 빼앗기고, 그 열매를 맺는 민족이 받으리라.’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그는 또다시 성경도 아닌 시편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믿음과 신념을 공격했다. 또한 그는 우리를 그 농부들로 비유하며 비난한 것이었는데, 그 이야기 속의 종은 세례 요한 같은 선지자들일 것이고, 아들은 그 자신을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바리새인들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해서 화가 났었다고 하던데, 정말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가? 그때 그를 사로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주변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일단은 참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세례 요한을 잃은 것을 슬퍼하던 사람들에게 그는 세례 요한과 맞먹는, 아니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날 이후로 그 작자는 날마다 성전에서 이런저런 말들로 가르쳤다.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들이었지만, 무식한 백성들은 뭐가 좋은지 그의 말을 열심히 듣고, 그의 편을 들었다. 이런 그를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사두개인뿐 아니라, 서기관, 바리새인, 백성의 우두머리들까지 동일해서, 각자의 방법으로 그를 트집 잡으려 했지만, 그는 번번이 빠져나가 버렸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의 옳고 그름에 관해 물었는데, 그는 데나리온 동전에 그려진 초상과 글자가 황제의 것이니,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라고 말해 바리새인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다음엔 사두개인들이 가서 그에게 부활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그 어떤 사두개인도 상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토라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기록된 것을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해석해 버린 것이다.
그 외에도 그는 서기관들의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질문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로 요약해서 그들의 동의를 얻었고, 오히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질문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이런 대답을 생각하면, 그는 확실히 뛰어난 사람임은 틀림없다. 이건 자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아까운 재능을 쓸데없는 데 낭비하고 있다. 그는 지도자들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공격을 해대는 것이다. 이러니 그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그냥 둘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 그를 처리하기 위한 방안을 회의하고 있는데, 이 또한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중이다.
“우리가 받은 모욕은 나중에 반드시 갚을 날이 올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그를 잡을 수가 없소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너무 많소이다. 그에게 어떤 조처를 취하기 위해서는 성전 경비병을 보내어 잡아들여야 할 텐데, 경비병들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그 많은 사람을 이기기란 불가능하오. 더군다나 지금은 명절이 다가오는 때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어서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외다.”
“두 번째 이유는?”
“그를 잡았다고 해도, 그다음엔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소이까? 그를 감옥에 가두어 두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민란이 일어날 것이오. 그러면 로마가 가만히 있겠소이까? 그 빌라도가요? 절대 그럴 리가 없소.”
“맞소이다. 백성 가운데서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명절에는 하지 맙시다. 그가 문제를 일으킨다고는 하지만, 소요가 일어날 만하면 떠나간다고 하니, 이번에도 그렇게 조용히 떠나길 바라야지요.”
다들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일 때, 밖에서 말고가 들어왔다.
“대제사장님, 예수를 넘기겠다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조금 전까지 명절엔 하지 말자던 사람들의 눈빛이 갑자기 달라졌다. 그를 잡을 수만 있다면 처리하는 방법은 어떻게든 생각해 내면 된다. 그가 자신들의 질문을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돌파했다면, 자신들이라고 못할 것이 무엇인가?
* * *
늦은 밤. 대제사장과 고위 제사장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룟 유다가 나타났다.
“예수를 당신들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겠소이까?”
노골적으로 대가를 바라는 가룟 유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김에, 조금의 추가 수입이라도 생기면 좋지 않을까 하며 말을 던져본 것이었다. 이에 대제사장 일행이 제시한 것은 은돈 서른 닢. 데나리온의 네 배 정도의 가치를 지닌 두로의 성전 세겔이었기에 백이십 데나리온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이라는 분이 지니신 가치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돈주머니를 맡아서 얻는 돈이 더 많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어차피 예상 밖의 수입이니 이 정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다.
사실 대제사장은 일부러 이 금액을 말한 것이었는데, 은 삼십 세겔은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아 죽게 했을 때, 종의 주인에게 갚아줄 돈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라는 사람은 결국 종 같이 별것 아닌 사람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리려는 의도였지만, 그들의 이런 생각조차 하나님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증거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통해서도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셨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시편 92:12, 스가랴 9:9, 마태복음 21:9, 13-16, 21:24-44, 22:21, 32, 26:5, 15, 마가복음 11:10, 17, 11:29-30, 12:1-11, 누가복음 19:38-40, 20:3-4, 20:9-18, 요한복음 12:13, 12:19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성경 원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평행 구절의 경우, 모든 내용이 다 포함되도록 하나로 합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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