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스모니안 왕조

저자의 글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시대가 되었을 때, 유대인은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극심한 종교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제우스의 현현이라 말하던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인들에게 희생 제사와 할례뿐 아니라, 안식일, 유월절과 같은 모든 절기를 지키는 것을 금지시켰고,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습니다. 또 성전에서 번제단을 치우고, 제우스를 위한 제단을 만들어 거기에 돼지로 희생 제물을 바치게 했으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에서 포로 귀환을 한 후 자신들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유일신이신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우상이나 다른 형상에 절하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다신교였던 주변 민족들이 보기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독특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안티오코스 4세의 정책은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그 와중에 하스모니안 가문의 제사장인 맛다디아가 자신의 다섯 아들을 데리고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을 기다리던 하시딤들과 힘을 합쳐 무장봉기를 감행했는데, 처음에는 작은 규모의 반란에 불과했지만, 맛다디아의 셋째 아들 유다의 지휘 아래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기 시작합니다. 그의 별명이 망치라는 뜻의 마카비였기 때문에, 이것을 마카비 전쟁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다 마카비는 성전이 더럽혀진 지 3년 반 만인, BC 164년 키슬레브월(현재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으로는 11-12월) 25일에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성전의 우상들을 철거한 후, 다시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세웠습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수전절(하누카)인데, 구약 성경에 유래가 없던 수전절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예수님 역시 요한복음 10장에서 이 수전절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마카비가 전사한 BC 160년 이후 그의 동생 요나단이 지휘권을 물려받았는데, 외교력이 뛰어났던 요나단은 셀레우코스의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에게 인정을 받아, BC 152년, 유대의 통치자 겸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오래지 않아 셀레우코스의 반군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을 당하고, 형제 중 마지막 남은 시몬이 이어받아, BC 142년 셀레우코스의 왕인 데미트리우스 2세에게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게 됩니다. 

 25년간의 독립투쟁 끝에 건국된 유대의 하스모니안 왕조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문제의 여지가 많았습니다. 비록 종교적으로는 자유를 얻었지만, 이들의 통치 역시 그토록 거부했던 헬라인의 모습을 닮아 있었고, 사독 가문 출신이 아닌 자신들이 대제사장을 겸직함으로써 함께 싸웠던 하시딤들마저 점차 반대 세력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첫 왕인 시몬은 사위에게 암살당해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 1세가 반란을 진압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힘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주변 지역을 공략하여 영토를 넓히게 됩니다.

 이때 사마리아를 점령한 힐카누스 1세는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하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던 제의를 금지 시켰는데, 이로 인해 사마리아인들은 기존의 모세 오경과는 신학적인 차이를 보이는 사마리아 오경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이두매(에돔) 지역을 점령했을 때는 주민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키기도 했는데, 이렇게 개종한 이두매인의 후예가 바로 헤롯왕입니다.

 또한 그의 시기에 하시딤의 주축인 바리새인들이 정권에서 밀려나고, 제사장이나 귀족층으로 이루어진 사두개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는데, 이때 쫓겨난 바리새인의 일부와 전임 대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광야의 은둔자인 에세네파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요한 힐카누스 1세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러스 1세 때에는 사마리아 위쪽인 갈릴리 지역까지 정복하여,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갈릴리로 이주하게 됩니다. 갈릴리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러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다시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방인들 역시 그곳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갈릴리인들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고, 이러한 시선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족이 언제 갈릴리로 이주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어쩌면 요한 힐카누스 1세의 정책으로 그들의 조상이 갈릴리로 이주했을 수도 있고, 그 이후 다른 시기에 했을 수도 있습니다. 정경으로 분류되는 성경에는 이러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본문에서 요셉의 이주와 관련된 설명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이라고 생각하시고 넘어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만 본문과 같은 설정을 한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요셉이 인구조사를 자기가 사는 지역에 하지 않고, 베들레헴에서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조사는 각자가 사는 지역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만약 요셉이 갈릴리에 확실한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입장이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하려고 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의 부모님의 시기에 있었던 기근이나 사회적 불안들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이어서 본문처럼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성경에 없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게 될 것인데, 이런 부분은 후기에서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 여러분이 이 글로 인해 오해나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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