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기들의 죽음

저자의 글

 성경에서 이 부분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집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들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니까요. 만약 이것이 예언의 성취가 아니었다면, 헤롯왕 탓을 하며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이 사건은 철저하게 예언의 성취로 기록되어 있기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사건이 분명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성경에서 이런 내용을 볼 때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오히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하나님처럼 느껴질 뿐이었죠. 또한 이런 일들은 성경에서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가질 수조차 없는 어린아이들의 죽음. 저는 이런 죽음 앞에서 여러 번 고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나요? 이렇게 데려가시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데, 이 아이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지옥에 보내시나요.”

 저뿐 아니라 여러분들 중에서도 이런 고민을 해보신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이 고민에서 해방되었던,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제법 있는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나름 성경에 근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기존의 신앙 상식을 가진 분들은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이야기 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저도 이 설명을 그대로 믿지는 않고, 하나님께서 이렇게라도 구원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까운 것이니, 마음에 들지 않으시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어린 아기의 죽음 앞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설명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1) 원죄는 죄 자체가 아니라,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2) 구원은 철저히 개인 구원이다.

 3) 죄를 사해주시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권한이고, 구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다.

 첫 번째 전제는 원죄 부분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모든 사람은 죄 그 자체가 아니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의미로서의 원죄가 이어져 온다고 가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고 스스로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기준을 한 번이라도 어기지 않을 방법이 없기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이 부분에서도 중요한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줍니다. 

 두 번째 전제는 누군가의 구원은 다른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믿음이 있다고 해도, 자녀가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부모가 믿음이 없다고 해도, 자녀는 그 스스로의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전제는 구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믿음을 가지게 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까요.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포함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첫 번째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두 번째와 세 번째 전제는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이 세 가지 전제로 어린 아기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집트를 떠나온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한 이후 원망할 때, 하나님이 심판을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민 14:29-31, 개역한글)

 많은 분이 이집트를 떠나온 사람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만 가나안으로 들어갔다고 착각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이집트를 떠나온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인구조사를 마친 스무 살 이상의 사람 중에서 들어간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지라도,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후에 아무 문제 없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스무 살이 되지 않은 미성년자들에 대해서 예외를 두시는 것을 보게 되는데,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아기들의 경우도 예외로 해주실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죄 부분에서도 설명했듯이, 사람은 죄를 실제로 지어야 죄인이 됩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죄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단 한 번이라도 죄를 지으면, 그 길로 영원한 죄인이 되니 모든 사람은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죠.

 로마서(5:18)와 고린도전서(15:22)에는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고 죽게 되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 말을 떠올리며 제가 하는 설명이 틀렸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말은 아담의 죄로 인한 우리의 보편적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고 해서 정말로 모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이, 성경에는 죽음을 겪지 않고 하늘에 오른 두 명의 예외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에녹(창 5:24, 히 11:5)과 엘리야(왕하 2:1, 11)입니다. 이 두 사람은 바울의 저 말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사람은 아니지만, 동시에 포함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보편적으로는 아담의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사람이, 예외적으로 죽지 않고 승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예외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우리에게도 일어날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의 말은 예외 조항이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죄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죄는 하나님의 기준을 어기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행동뿐 아니라, 생각도 포함된 강력한 기준이기에 도저히 사람으로서 죄인이 되지 않을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를 짓는다면 그는 어리던, 아니던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판단할 여지조차 거의 없는 갓난아기와 태아의 경우 실제로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 죽을 수도 있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예외를 두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아기가 실제로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 아이는 의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죄인은 아니기에 구원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이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부딪히는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이 구원 방법도 예수님을 통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개역한글)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자신을 통해야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그곳은 우리가 구원받아 가게 되는 천국입니다.

 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개역한글)

 이와 같은 설명은 신약 성경 전반에 계속 나오는데, 요약하면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설명에 대해서 무조건 동의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는 다른 구원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린 아기처럼 들을 수도, 마음으로 믿을 수도, 입으로 시인할 수도 없는 경우에 대해서 하나님이 예외를 두실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가능성은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말에서 엿볼 수 있는데, 바울이 아테네에서 한 설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개역한글)

 알지 못하던 시기에 우상 숭배한 것을 하나님께서 허물치 아니하셨다는 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예외를 두시기도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고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어린 아기의 죽음과 같은 상황 말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이런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가능한지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위 3번의 전제처럼 죄를 사하는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속죄 제물, 화목 제물로 드리셔서, 그 권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 막 2:10, 눅 5:24, 개역한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의지가 담겨있는 행동이지, 무조건 자동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면 예수님이 자신이 받은 권세로 용서를 해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회개한다고 무조건 용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말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예수님의 용서와 구원은 사람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선물이기에, 저는 아기들의 구원에 대해서도 일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개역한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다면, 스스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불가능한 어린 아기들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구원의 길을 만들어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런 설명이 믿음과 구원에 관해 말하는 로마서의 내용과 배치되는 것일까요?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개역한글)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19-31, 개역한글)

 바울의 설명과 같이,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율법이든 다른 어떤 방법이든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행함도, 깨달음도, 믿음도 불가능한 아기와 태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어떠한 조건에도 해당하지 않는 아이에 대해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아이. 하나님의 기준을 어긋나는 어떠한 죄도 짓지 않았지만, 어떤 행위로도 스스로의 의로움을 증명조차 못할 아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권한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곁으로 데리고 오기로 결단하신다면. 만약 그런 구원 방식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이 또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많은 분들의 신앙과 부딪히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저 또한 이런 설명을 하고 있음에도, 자연스럽게 저항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서와 같이 이미 성경에 예외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저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 과연 옳은 태도일까요?

 저는 태아와 아기가 무조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외적인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제발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구원해 주셨으면 하고 간절히 원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저는 지금 구원에서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주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행함도, 율법도, 믿음에 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또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그 제단 위에 놓여 있는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한다.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 23:17-19, 새번역)

 저도 똑같은 방식으로 말해보겠습니다.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이 중요합니까? 그 믿음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중요합니까? 단연코, 하나님의 주권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판단이 가능한 모든 사람은 다 성경에 쓰인 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다. 이건 정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판단도 깨달음도 믿음도 불가능한 경우, 하나님의 주권이 조금 더 강하게 들어갈 수 있다 한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어그러뜨리는 것이겠습니까? 

 이런 관점으로 헤롯왕의 유아 학살 사건을 다시 살펴보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내용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죽임을 당한 아이들의 구원 가능성 말입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까지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유아 학살 예언이 나와 있는 예레미야 31:15 바로 다음에 이어진 구절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라헬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부분까지만 적혀 있지만, 원래의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더 있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렘 31:16-17, 새번역)

 하나님은 그들의 아들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 예언이 헤롯왕의 유아 학살 예언으로도 사용되었기에 이 뒷부분 또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는 아들딸들에 관한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런 해석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전 이 길을 한번 믿어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의지해서 말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마 19:14, 개역한글)

Post a Comment

Next Post Previous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