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나사렛으로 돌아가기까지 (1)

늙은 목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방목된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양 떼의 주변에선 두 마리의 목양견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한 마리는 오랫동안 훌륭하게 양을 지켜왔던 충견이고, 다른 한 마리는 양치기를 배운 지 얼마 안 된 강아지이다. 목양견은 대부분 케이넌 품종을 사용한다. 그들은 다른 개들과 달리 3년 가까이 자라야 완전한 성견이 된다. 하지만 온순하고 인내심과 경계심이 강해 양을 보호하는 데 유대 땅에서 이 이상 좋은 품종은 없다. 실제로 지금의 성견도 예전에 맹수와 싸우다가 크게 다쳤지만, 끝까지 양을 지켜낸 적이 있다. 

 두 목양견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가곤 했다. 아마도 나이 든 쪽이 어린 쪽에 무언가를 가르치는 중인 것 같다. 오랜 세월 양치기 개로 살아오며 쌓아온 노하우를 모조리 전수하려는 듯, 나이 든 쪽의 표정이 새삼 진지해 보인다. 이번에 두 목양견이 달려가는 곳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양들이 있다. 어린 양들은 아직은 익숙지 않은 걸음을 떼며 어미 주위를 아장아장 걷고 있다. 어미와 새끼 옆에서 보호하듯 지켜보는 목양견들. 그들의 보호 속에서 어린 양은 아무런 위험 없이 세상에 태어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 양과 목양견을 보며 목자는 한숨을 쉬었다. 만약 자신이 그날 딸과 손자 곁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손자를 구해내었을 텐데….

 요셉과 마리아가 갑자기 이집트로 떠난 다음, 자신은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하고 별생각 없이 다시 양 떼에게 돌아왔었다. 메시야께서 큰 위기를 넘긴 것을 감사하며, 기분 좋게 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오후에 갑작스레 소식이 들려왔다. 병사들이 베들레헴과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기들을 죽이고 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양들도 팽개치고 딸의 집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손자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그 옆에서 아내와 딸, 그리고 사위가 오열하고 있었다. 모두가 일을 나간 시간, 손자와 딸만 있는 집에 병사들이 쳐들어와 다짜고짜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딸이 그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건장한 병사들을 무슨 수로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손자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헤롯왕과 병사들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아무 죄도 없는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또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그들을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대부분의 일은 순리라 생각하며 넘어가는 자신조차, 그때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자신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낼 때, 다른 가족들 역시 각자의 지옥을 살고 있었다.

 아내는 그 사건 이후로 온 세상을 잃은 듯, 멍하게 앉아 있곤 했다.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아내는 딸의 집으로 갔지만 딸은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딸은 식음을 전폐하고 하루 종일 울고만 있었다. 아내가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딸의 모습을 보며, 아내는 더욱 큰 절망에 빠졌다. 사위는 사위 나름대로 해결 방법을 찾아서 밖으로 나돌았다. 그는 그날 이후로 사회에 불만이 있는 목자들과 어울리고 다녔는데, 아트롱게스라는 자가 우두머리처럼 있는 집단이었다. 아트롱게스와 네 명의 형제들은 하나 같이 힘이 세고, 키가 커서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성품이 잔인하다는 소문이 있어서, 사위가 복수를 하려다 더 나쁜 길로 빠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예루살렘에 사는 첫째 딸과 첫째 사위도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또 다른 방법으로 이 일을 해결하려 했다. 첫째 사위는 목자로 일하는 둘째 사위와 달리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좀 더 정치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율법의 최고 해석자인 유다와 맛다디야라는 선생들이 있었는데, 첫째 사위는 그들에게 찾아가 이 사건을 고발했다. 이 사건을 들은 두 사람은 헤롯이 곧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함께 힘을 합치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불과 몇 개월 뒤에 현실이 되었다.

 해가 바뀌고, 봄이 온 얼마 뒤에 헤롯이 죽었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돌았다. 그날은 월식이 있던 날이었는데, 소문을 들은 유다와 맛다디야는 수많은 젊은이를 선동해 성전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헤롯이 성전에 봉헌한 금 독수리상을 끌어 내려,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에서 도끼로 박살 냈다. 하지만 헤롯이 죽었다는 소문은 거짓이었고, 곧 들이닥친 병사들의 습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게 되었다. 다만 주도자인 유다와 맛다디야, 그리고 끝까지 도망치지 않은 40명의 사람이 잡혔는데, 그곳에 첫째 사위도 끼어있었다. 그들은 헤롯왕에게 심문당할 때, 헤롯이 어긴 율법을 바로잡기 위해 그렇게 했으니,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 여리고에서 벌어진 재판을 통해, 주동자인 유다와 맛다디야는 산 채로 화형을 당하게 되었고, 사위를 포함한 40명의 젊은이는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제사장으로 있던 맛다디야 벤 테오빌로가 요아살 벤 보에투스로 교체되었다. 요아살은 맛다디야의 처남이었는데, 그 전의 대제사장이던 시몬과 인척인 사람이었다. 

 이런 사건들 속에서도 헤롯은 꿋꿋이 왕권을 지켜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다. 그의 말년은 정말 비참했는데, 들리는 소문으론 내장에 궤양이 생기고, 발에는 수종이 생겼으며, 은밀한 부위가 곪아서 벌레까지 생겼다고 한다. 또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으면 숨을 쉬기 힘들어했고,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몸에서 악취도 많이 풍겼다고 한다. 그의 병세는 요단강 동편의 온천에서 목욕을 한 이후 조금 차도를 보였지만 여리고의 왕성으로 돌아간 다음부터 다시 심해졌다. 헤롯은 그때부터 점점 난폭해져,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유대 전체의 유력 인사들을 불러 모아, 여리고의 경기장에 가두어두고 자신이 죽으면 그들도 같이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죽는 날, 온 유대인들이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말이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과 매제에게 그 말을 지키도록 맹세를 강요했다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맹세를 지키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에 헤롯은 자살 시도까지 했는데, 그 소문이 와전되어 헤롯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이로 인한 애곡 소리가 감옥까지 들리게 되었다. 헤롯의 장자 안티파테르는 이 소리를 듣고, 자신이 이제 왕이 될 것이니 풀어달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간수가 이 말을 헤롯에게 고발했고, 헤롯은 그 즉시 병사를 보내어 안티파테르를 처형했다. 이렇게 자신의 권력을 얻기 위해 남들을 죽이던 자들이 하나씩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음은 헤롯왕의 차례였다. 헤롯왕은 아들을 처형하고 나서 정확히 5일 뒤에 죽었다. 그 사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유언장을 고쳐 썼는데, 여섯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켈라오에게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를, 동복인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일곱째 부인인 클레오파트라에게서 태어난 빌립에게는 골란과 드라고닛, 파네아스를, 동생인 살로메에게는 암니아, 아스돗, 파사엘리스를 주기로 했다.

 이렇게 헤롯왕의 죽음으로 헤롯 왕조의 악이 하나님께 심판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은 그 이후로 더한 죄를 저질렀다. 다행히 유대의 유력자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인 아켈라오로 인해 유대인 삼천 명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헤롯왕이 죽은 후, 사람들은 아켈라오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했다. 그중에는 물건을 사고 팔 때 내는 세금을 아예 내지 않게 해달라는 등, 너무 과한 요구들도 있었다. 아켈라오는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처형당한 유다와 맛다디야를 위해 애곡하며, 헤롯왕에 대한 비난까지 퍼부었다. 물론 헤롯왕은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경계를 넘은 이런 행동은 백성들의 소요로 이어졌고,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아직 로마의 황제에게 왕위를 추인받지 못한 아켈라오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유월절이 다가오면서는 반란 조짐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주동자들은 더 나아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병사들을 공격해 죽였는데, 이에 아켈라오는 전군을 동원해 삼천 명의 사람을 죽여 본보기로 삼았다. 이와 같이 양쪽 다 잘못한 상황이긴 하지만, 아켈라오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경계를 넘은 사람들의 악은 그를 통해 심판받았지만, 그 역시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악한 자를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시니 말이다. 

 이후에 아켈라오는 많은 사람과 함께 로마로 향했고, 헤롯 왕가의 재산은 로마군이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것도 말만 관리일 뿐, 또 다른 수탈로 이어지는 것 같다.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비누스가 왕가의 재산 목록을 적어내라고 한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니 앞으로 유대 상황이 어떻게 변해갈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왠지 안티고누스의 반란 때처럼 모두에게 힘든 시기가 찾아올 것 같은 예감도 든다. 사람들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악한 일을 서슴없이 행하는 악한 시대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들을 키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양들을 흠 없이 키운다 한들, 이런 사람들에게 받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이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같은 이유로 지금 시대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일까? 메시야를 지금 이때 보내주신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겠지? 

 떠나간 메시야와 그 가족들이 생각난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줄 것 같지 않던 선한 사람들. 한때는 그들 때문에 손자가 죽었다는 원망을 한 적도 있다. 그런 적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오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손자이기도 하니 말이다. 물론 그때는 그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비롯해 모두를 원망하던 시기였으니, 누가 그 원망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이런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어쩌면 그렇게 빨리 죽은 것이 오히려 더 잘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악한 시대를 살며, 악한 세상에 물들어 악한 삶을 살 바엔, 그렇게 죄짓지 않은 상태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선 더 나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벨이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해서, 이른 나이에 죽었다고 한들, 그의 인생이 헛되고,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 인정을 받았으니, 그의 죽음 이후는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천국에서의 영생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손자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짓지 않았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주신 언약을 근거로 천국에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아이의 인생도 의미가 없는 인생은 아니었으리라.

 목자의 얼굴이 조금씩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를 감싸고 있던 죄책감이 말씀을 통해 해석되었다. 고난에서 의미를 찾으니,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었다. 목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고, 평생을 경험해 오고 있었다. 종으로 팔려 온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죽음과 아내와의 결혼. 그리고 이후의 목자 생활까지 단 한 번도 쉽게 넘어온 적이 없었지만, 그 모든 시기에 하나님은 함께 해 주셨다.

 하나님은 한 번도 자신을 떠나신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사랑을 깨닫게 해주셨고, 진정한 용서를 경험하게 해주셨다.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과 사건, 말씀으로 자신을 양육해 주고 계셨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모세와 같이 자신 역시 그사이에 계속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보리를 수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옛날 저 어딘가에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을 것이다. 그들의 만남 또한 여러 죽음을 겪은 후, 절망 속에서 찾은 희망이었다. 남편과 아들 둘을 잃고, 며느리인 모압 여인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 굶어 죽을 수밖에 없던 두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죽게 두지 않으셨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은혜의 말씀으로 인해 보아스와 룻이 만났고, 그들을 통해 다윗왕이 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윗왕의 후손으로 메시야까지 오시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이 광대한 계획의 시작이 도대체 언제부터였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아니면 야곱이 아들 유다에게 예언할 때?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던 때? 아니 어쩌면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날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래, 주님의 생각을 어찌 사람이 알 수 있으랴.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실 것이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니라. 맞다. 하나님은 여호와 주님이시다. 주님은 항상 옳으시다. 그런 하나님을 잠시라도 의심하고 원망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운 목자였다. 그는 눈을 감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그에게는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있었다. 유대의 척박한 땅에서 뿌려지고 자라나는 곡식들처럼, 그의 인생은 모진 풍파로 가득했지만, 그는 삶의 여정과 말씀을 통해 가장 큰 고난을 해석하고, 새로운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위로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고, 위로를 전하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선한 자에게도, 죄인에게도 똑같이 태양과 비를 내리신다. 들의 꽃은 금세 시들어도 언제고 다시 피어난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그러니 삶에 폭풍이 몰려오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냐, 없느냐이다.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은 그 안에서 아무 의미도 발견하지 못해서이다. 악한 자가 아니라, 선한 자로서 죽는다면 그 이상 감사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의인의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누구보다 빨리 가서 하나님과 함께 거할 그들의 삶에 왜 슬퍼해야 하는가?

 목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처럼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리한 푸른 하늘이 있었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으니, 무엇을 망설이랴? 위로를 듣기를 거부한 라헬과도 같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을 전할 것이다. 하나님은 진정 옳으신 분이시다.


 “나 주가 말한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마태복음 2:13, 17-18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작성했으며, 마지막 부분의 예레미야 31:16-17절은 새번역을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오디오북으로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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