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은 요단강 동편의 베다니를 떠나, 북쪽에 있는 살렘 근처의 애논으로 옮겨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다. 애논은 데가볼리 지방에서 가까웠는데, 데가볼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식민지가 된 열 개의 주요 도시가 연맹 형식으로 다스리는 땅이었다. 이들은 폼페이우스의 유대 정벌 시절에 로마에게 협력한 공로로 자치와 통상, 면세의 특권을 받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 주변에는 유대인보다 이방인들이 더 많이 살고 있었다. 헬라의 문화가 융성한 그곳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애논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데가볼리 사람들이 오기에 멀지 않은 적당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일부러 이곳을 택했다.
세례 요한은 이곳에서도 남쪽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는 이 주변의 사람들 역시 메시야를 맞이할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쪽에 남아있던 제자가 찾아왔다. 이 제자는 어떤 유대 사람과 정결 예법을 두고 논쟁한 후, 자신에게 질문하기 위해 온 것이었는데, 그분에 관한 소식도 더불어 가지고 왔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세례 요한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그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자신은 분명 그분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분은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했으니 기쁘다고 생각했지만, 목표가 사라지자, 앞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을지 고민이 되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사명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사명은 분명 메시야를 맞이할 백성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의 제자가 되어, 그를 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어쩌면 그냥 지금 이대로 계속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는데, 자신이 일차로 세례를 주고, 그분에게로 보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그가 베푸는 물세례의 문제이다. 나중에 다시 들으니, 그가 직접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아니고, 그의 제자들이 세례를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물론 그의 제자들이 세례를 주는 것 자체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분 쪽에서 물세례까지 하게 된다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길 원한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들이 자신의 역할마저 가져간다면, 남은 자신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제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일까?
세례 요한은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가 사라져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렇듯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세례 요한조차, 하늘나라의 일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 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들도 알고 있는 이 진실을 머리로만 알고 마음으로 깨닫지는 못했다. 그는 아직도 땅에 속한 자였다.
세례 요한은 깊은 고민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 예전에 에세네파에게서 들었던 대제사장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왕으로 오실 메시야보다 더 높으신,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 그분은 유대를 독립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하실 분이시다. 자신이 세례를 준 그분은 왕으로 오신 메시야일 것이니, 분명 다른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런 생각이 요한의 마음속에 홀연히 나타나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는 그분이 단순히 왕으로 오신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분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자,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었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분이셨다. 하지만 이것들이 제사장의 역할은 아니라는 교묘한 합리화가 그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는 오직 이 길에서만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계속 세례를 주면서 대제사장으로 오실 메시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되면, 그분의 제자들이 물세례를 주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여기면서 말이다. 그는 이렇게 잘못된 지식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해 버렸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데, 요한은 그 진노의 길로 들어서고야 말았다. 이제 그토록 부르짖었던 회개를 그 자신이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힘이 완전히 빠지기 전까지는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얼마 후 세례 요한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보낸 병사에게 사로잡혀 베레아의 남쪽에 있는 마케루스 요새에 갇히게 되었다. 예전에 헤롯 안티파스가 한 여러 가지 악행을 비판한 것과 헤로디아와의 결혼 문제를 지적한 것이 이런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안티파스는 페트라를 수도로 삼은, 나바테아의 왕 아라테스의 딸과 혼인하여 오랫동안 살고 있었는데, 로마를 방문하는 일정 동안 대제사장의 딸 미리암네 2세에게서 태어난 빌립의 집에 거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안티파스는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보고 사랑에 빠졌는데, 헤로디아는 두 사람의 이복형제 아리스토불러스의 딸로서, 나중에 유대의 왕이 되는 헤롯 아그립바와 남매지간이기도 했다.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에게 청혼했고, 헤로디아는 이미 결혼을 한 유부녀였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두었는데, 그것은 그의 이혼이었다.
안티파스의 아내는 남편이 귀국하기 전에 그 사실을 전해 들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고국인 나바테아와의 국경에 있는 마케루스 요새에 잠시 다녀오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안티파스는 별 의심 없이 그것을 허락해 주었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나바테아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아버지에게 도망쳐버렸다.
세례 요한은 이런 그의 행동을 격하게 꾸짖었는데, 안티파스는 안 그래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 예의 주시하던 차에 기회다 싶어 그를 잡아버린 것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마침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보다 예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준다는 소문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한 최적의 시기이기도 했다. 아직은 그들과 다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사마리아 방향으로 이어지는 족장의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요한복음 3:26-36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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