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산헤드린 공회도 언제나처럼 사두개인들의 주도로 끝이 났다. 그들은 평소에는 서로 간에 약간의 적대감을 가지고 반목하면서도, 공통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목소리를 내곤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두개인들은 지방으로 가면 바리새인들처럼 행동하기도 하는데, 백성들이 바리새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따르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들 안에 몇 개의 얼굴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긴 선이든 악이든 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오직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그들이니, 그런 태도 변화조차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과 관련 없이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 것이지 왜 성전을 붙잡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매번 유월절 즈음이 되면,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들의 반역에 긴장하여 성전의 서북쪽 회랑 모퉁이와 그 근처 안토니아 요새에 감시병을 늘리곤 한다. 이번 공회의 주요 안건 역시 그것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소요를 일으키는 사람이 없는지 잘 살펴보고, 그런 낌새가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성전 수비병을 동원해 쫓아낸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것 외에는 희생 제물을 얼마나 준비해 놓을지, 조달엔 문제가 없는지, 순례자들에게 바꾸어줄 성전 세겔은 충분한지 등과 같은 경제적인 안건들이 많았다. 어떻게든 성전 건축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 포장하지만, 실상은 안나스 가문에 흘러 들어가는 돈이 상당수일 것이다. 그들의 계속된 권력 유지의 배경도 바로 그 돈이겠지. 겉으로는 하나님과 유대인을 위한 일인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자들.
아켈라오가 쫓겨나고, 로마에 의해 인구조사가 시행될 때, 유대인들의 반란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제사장 요아살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안나스가 올라갔다. 그는 대제사장을 9년 정도 했는데, 그때부터 그의 가문이 성전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다른 대제사장이 있었던 기간도 잠시 있었지만, 지금 대제사장 가야바까지 해서 25년간 벌써 세 명째의 대제사장이 그들에게서 나왔다. 중간에 2년 정도를 제외하고 나머지 22~23년을 자기들끼리 해 먹었으니, 뒤에서 총독들에게 얼마나 많은 뇌물을 주었을까?
지금의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서 벌써 10여 년 가까이 대제사장을 하고 있다. 그는 멀쩡히 있는 안나스의 아들들을 제치고 대제사장이 되었고, 장인인 안나스가 대제사장을 했던 기간 이상으로 그 자리를 맡고 있으니, 정말 보통 간교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게 말하면 정치력이 좋고, 나쁘게 말하면 정치공작을 하는 능력이 엄청나다고 할 수 있겠지. 앞으로는 로마 총독들에게 잘 보여야 하고, 뒤로는 경쟁자들을 물리쳐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겠는가?
그런 가야바에게도 이번 총독 빌라도는 쉬운 대상이 아니었다. 빌라도는 부임 첫 주부터 큰 문제를 일으켰고, 이후에도 유대의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로 인해 많은 유대인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성전 건축도 그가 부임한 이후로 지지부진한 중이다.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3~4년 전의 공사를 마지막으로 성전이 다 지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완공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장 건축 초기에 기초가 내려앉으면서 무너진 20규빗도 언제 다시 세울지 계획조차 잡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빌라도로 인해 가야바 역시 머리가 매우 아플 것이다. 조금은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대제사장인 그가 로마에 밉보이면 그 또한 유대인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니, 그가 잘되지 않기를 바랄 수만도 없다. 정치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니고데모는 공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다시 한번 무기력함을 느꼈다. 백성의 지도자로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자신이지만, 비주류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도 없거니와, 무엇을 해야 옳은지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유대인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믿는다. 그것을 위해서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온전히 지키라고 가르치는데, 돌아가는 현실을 보면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들이 가고 있는 방향이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각자의 의지로 의를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인데, 아무리 율법의 행함을 가르쳐도 그날이 오지 못한다면, 이 방법이 정말로 옳다 말할 수 있을까?
니고데모는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평생을 바리새인으로 살아온 그로서는, 이 길이 바른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인정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방법으론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결론 또한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퍼져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이방인의 뜰 한 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니고데모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노끈을 채찍처럼 휘둘러 소와 양을 파는 사람들을 내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기세에 눌려 동물들을 데리고 성전 밖으로 쫓겨 가는 상인들. 저들 대부분은 안나스 가문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니,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니고데모는 자기도 모르게 이미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남자는 소와 양을 내쫓은 다음, 외국의 돈들을 성전 세겔로 바꾸어주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돈을 쏟고, 상을 둘러엎었다. 그러고는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내 아버지의 집. 그 말을 듣자, 니고데모의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그 역시도 저렇게 의를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던 시기가 있었다. 수십 년 전, 처음 바리새인이 되어 하나님과 유대인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했던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자, 니고데모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니고데모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몰라도, 꽤 단단한 근육을 가진 날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보이는 여러 명의 장정도 있었다. 안나스 일파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성전에서 저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라면 저들은 갈릴리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갈릴리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전쟁에 익숙했기 때문에 용맹한 자들이 수도 없이 나왔고, 주민 중에 단 한 명도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근면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성격이 잘못 표출된 쪽이 열심당인데, 그 열정이 좋은 쪽으로 표출되면, 지금 저 사람과 같이 행동하지 않을까?
그때 몇몇 사람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저들도 자신처럼 저 사람을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이겠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그의 대답을 들은 그들만큼이나 자신도 놀랐다. 반문한 사람이 빌라도가 부임한 이후 멈춘 공사를 완공이라고 착각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한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었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이것은 신성모독적인 발언이었다. 니고데모는 남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듣고 싶었지만, 그는 더 이상의 어떤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려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성전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성전 경비병들이 달려왔지만, 그는 이미 떠난 후였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아직 하나도 없었지만, 어쩌면 그가 자신이 바라던 새로운 길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니고데모의 마음 한편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 * *
니고데모는 그날 이후로 그에 관한 소식을 여기저기에서 듣게 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가르침들과 표징을 백성들 사이에서 보였고, 이를 통해 그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다만 그가 누군가에게 몸을 맡기고 있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그를 후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의 행보에도 큰 힘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자신에 대한 어떤 누군가의 증언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행동과 이후에 들려오는 소문들로 인해 니고데모는 확신이 생겼다. 성경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사람이야말로 그 말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어떻게든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지금의 상황에 대해 그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 그라면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을 자신에게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니고데모는 며칠을 수소문해서 그가 머무는 곳을 알아내었다. 저녁 무렵 찾아간 그곳에는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모두 그를 닮아 있었다. 자신감 있고, 옳은 일을 한다는 표정.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당당히 서 있는 바로 그 사람.
니고데모는 입을 열어 말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는 자신의 고민을 안다는 듯,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래, 자신이 나누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야기들이다. 다만 다시 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그는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 그리고 육, 영, 바람의 비유까지.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 * *
그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니고데모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그는 말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것은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이었다. 율법을 완전히 행함으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길. 유대인에게 있어서 물로 씻는다는 것은 당연히 정결을 의미하니, 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비슷한 뜻일 것이다. 그가 만약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라면, 회개를 통한 정결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무엇일까?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고 했으니, 물로 육을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성령으로 영을 깨끗하게 하란 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아직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의 비유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처럼 성령도 가고 싶은 데로 간다는 의미일 수 있다.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그 소리를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성령의 임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란 말일까? 그렇다면 그 성령은 하나님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의 말이 하나님이 보내주고 싶은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의미라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에게 그 성령을 보내주실까? 그는 말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성령을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사람에게 보내주시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라니. 그 말이 무슨 의미일까? 설마 유일하신 하나님께 외아들이 있다는 의미일까?
그는 다음에 이런 말을 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그는 여기에서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말도 한다. 이 부분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만, 일단 그가 말한 하나님의 외아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그 사람에 대해 한 가지 설명을 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그는 그 하나님의 외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했다. 사람의 아들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그와 대화할 때는 몰랐지만, 그는 정말 자신이 생각조차 못 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유대인이 기다리는 왕으로 오실 메시야와 에세네파가 기다리는 또 한 명의 대제사장으로 오실 메시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이상을 말한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말하고,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그 아들의 이름을 믿고 안 믿는지에 따라서 심판을 받고 안 받고가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집에 도착해,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생각을 이어갔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외아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가 하는 말이 정말로 맞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 율법의 행함이 아닌 성령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한 길. 니고데모는 두근대는 심장을 느끼며, 점점 잠에 빠져 들었다.
그의 꿈속에 이십여 년 전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났던 한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때는 그도 이렇게 늙지 않은 시절,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을 때였다. 그 소년은 성전에서 여러 선생 가운데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질문도 했다. 소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해 마지않았는데, 자신도 그 대화를 들으며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소년은 며칠 후 나타난 부모가 데리고 사라졌는데, 그때 소년과 부모가 나눈 대화가 이런 내용이었다.
“얘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아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부모를 당황하게 만든 그 대답. 어쩌면 그 소년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일지 모른다.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의 아들이 된 자.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을 목격했다. 그래, 그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장한 그를 다시 만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리라.
꿈에서 깨어나면 잊게 될 기억이지만, 니고데모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 중의 하나임을 가슴 벅차게 느낄 수 있었다. 잠든 니고데모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다음날부터 니고데모는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의 마음에 새로운 씨앗이 뿌려져 있었지만, 그 씨앗이 자라 무성하게 자랄 때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에게 던져진 사건 속에서 행동할 용기를 보이는 그날, 그는 꿈속에서 만났던 하나님의 아들을 진정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유월절이 끝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지방의 요단강 근처에 머물렀다. 그곳으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 들었고, 제자들은 그들에게 요한이 전했던 회개의 세례를 주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누가복음 2:48-49, 요한복음 2:16-20, 3:2-21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오디오북으로 들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