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숲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된 곳,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작은 마을 나사렛. 늘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서 있는 그곳을 보자, 마리아는 지금의 고민들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이 마을에서 살아오면서 힘든 일이 어떻게 한 번도 없었겠는가? 아버지가 다치는 사건으로 고생이 시작되기 전부터 삶은 팍팍했고, 수많은 걱정거리가 있었다. 가뭄이나 빚 같은 외적인 문제뿐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에서도 늘 좋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들 속에서도 자신의 가족은 하나가 되어갔고, 신뢰가 굳건해져 갔다. 지금의 좋은 분위기 역시 그런 삶의 결론이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만약 부모님이 없었다면, 동생들이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요셉이 생각이 많고, 고민이 많은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도 그와 같은 삶의 무게를 견뎌내야 했다면, 의지할 곳 없이 홀로 그 모든 순간을 겪어야 했다면, 그와 똑같이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자신의 불만이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좋게 보려면 좋은 점이 많은 사람이 요셉이다. 그는 침착하고, 쉽게 화를 내지 않는다. 이기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항상 남을 생각하고 배려해 준다. 그는 실수도 많이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그가 변하려고 노력한다면, 자신 역시 변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혼을 남편과 아내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정의하신 것이 아닐까?
물론 처음부터 요셉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과 처음부터 맞을 수는 없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더 많이 알아가다 보면 그의 행동들도 조금씩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에겐 믿음의 씨앗이 있으니, 그것을 믿고 가면 될 것이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마리아는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알아가기 위해, 이 모든 일이 시작된 우물가로 가보기로 했다. 그곳에 도착한 마리아는 요셉이 앉았던 버드나무 둥치에 몸을 기대었다.
그날 요셉은 이곳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잘 알지도 못하던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날 자신은 가장 친한 친구와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일 때문에 힘든 이야기나, 어떤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인지 하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친구는 기회만 되면 이상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곤 했기 때문에 아마 그것이 맞을 것이다.
친구는 늘 잘생긴 부자와 결혼하고 싶어 했는데, 어릴 적부터 정말 예뻤던 친구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여러 사람 중의 한 명을 고르라면 누구라도 그중에서 가장 괜찮은 사람을 고르고 싶을 테니 말이다. 자신이 친구의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것 같다.
친구의 부모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자신과 요셉의 결혼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이, 친구는 세포리스에 사는 어느 부자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다. 자기가 꿈꾸던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니 잘 되었다 축하했지만, 조금은 씁쓸한 마음도 들었었다. 그때엔 가장 친한 친구와 멀어지게 된 것이 슬퍼서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자신의 마음 한편에서 요셉과 친구의 남편을 비교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친구가 시집간 세포리스는 헤롯왕이 젊은 시절 갈릴리 지방의 행정관으로 있을 때 살았던 도시인데,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갈릴리의 주도인 큰 도시이다. 샘과 하천이 풍부한 언덕 위의 세워진 세포리스는 문화도 발달 되어 있고, 교통까지 좋아서 듣도 보도 못한 물건들이 시장에 널려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마리아는 말로만 들었던 세포리스의 풍족한 환경이 상상되자, 왠지 친구의 미래와 자신의 미래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큰 차이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겨우 내려놓았던 불만이 다시 한번 일어났다. 마리아는 불처럼 일어난 헛된 욕심을 날려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요셉에게 돈은 없지만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이 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말씀을 지키려는 순전한 열심이 누구보다 크다. 그렇다면 그것만으로 된 것 아닐까? 친구와 자신은 각자의 삶을 선택한 것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 된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더 바른 삶을 사는지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더 풍족하게 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욕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느끼려 했다.
* * *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눈을 감고 있던 마리아의 귀에 생소하지만, 어딘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아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당황해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는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서있었다. 은은한 빛이 나는 사람. ‘사람이 어떻게 빛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야.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가 무궁하리라.”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이러므로 태어나실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보라, 네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잉태하지 못한다고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저는 주님의 여종이오니,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빛나는 사람은 마리아의 대답에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리아는 눈을 비볐지만, 그녀의 눈앞에는 수없이 보아왔던 우물가의 평온한 풍경만이 남아있을 뿐, 조금 전까지 있었던 빛나는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상황은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꿈이라기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무슨 의미일까? 자신이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고 했다. 예수라면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그 아이가 나중에 위대하게 되고, 다윗의 왕위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린다는 것은 메시야가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아이라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일까? 그 사람에게 그 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고백했지만, 선뜻 믿어지지는 않았다. 자신은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집안에서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자신이 뭐라고 이런 일이 일어날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거기에는 낯선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엄마.”
“뭘 그리 호들갑이니? 자, 인사해라. 좋은 소식을 전해주려 멀리서 오신 분이란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당신이 마리아군요.”
“네.”
“마리아야,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구나.”
“네?”
“너도 놀랐지? 나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게 정말이죠?”
“그럼, 말도 안 되지 않니? 어떻게 그 나이에 임신했지?”
수다스럽게 상황을 전하는 어머니의 표정은 소식을 전해주러 온 사람보다 더 뿌듯해 보였다.
“저기 죄송하지만, 혹시 혼자서 오신 건가요? 함께 오신 다른 분이 있다거나….”
“아니에요. 저 혼자 왔어요.”
“정말이죠? 어딘가 좀 빛나는 것 같은 사람이라든지, 그런 분과 오신 거 아니시죠?”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아니에요. 엄마. 그냥 해본 말이에요.”
어머니가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놀란 건 누가 뭐래도 바로 자신이었다.
“엄마, 나 엘리사벳께 다녀올게요.”
“안 그래도 좀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오긴 했는데. 너도 지금 결혼을 앞둔 상황이라 대답하기가 어렵더구나. 정말 다녀올 수 있겠니?”
“당연히, 아니 꼭 가야 해요. 지금 바로 준비하고 나올게요.”
“지금 바로?”
“네, 바로 갈 거예요.”
“아버지와 요셉한테 말이라도 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니니? 너무 급하게 출발하는 것 같은데….”
어머니의 잔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지만, 아무런 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사벳이 임신을 했다면, 자신이 들은 말도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확실한 답을 듣고 싶었다. 엘리사벳에게 가면 무언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마리아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건 엄마가 말 잘 해주세요.”
마리아는 무언가를 계속 말하는 어머니를 두고 보자기를 펼쳐 옷가지들을 챙겼다. 뭔가에 꽂히면 아무 말도 듣지 않는 마리아인 것을 알았기에, 마리아의 어머니는 설득해도 안 될 것이란 걸 직감했다. 유대 지방의 엔 케렘까지 가는 길이야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과 함께 가면 되니 걱정이 없었지만, 남편과 요셉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복잡해지는 어머니였다.
문을 열고 떠나가는 마리아의 뒤로 그녀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 흔적과 같이 그녀가 남기는 삶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길일까 아니면 자신의 욕망이 새겨진 길일까? 지금, 이 순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길로 인도받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힘차게 내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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