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제가 도와드릴 건 없어요?”
음식 준비가 한창인 커다란 주방에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한 젊은이가 들어와 말했다.
“괜찮아.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도와주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뭘.”
여인은 옆에 있는 사람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돕고 싶은데….”
“그러면 위층에 계신 분들을 도와줄래? 좀 이따 예수님과 제자들이 거기서 식사하실 거니까 식탁이랑 의자를 좀 더 놓아야 할 거고, 등불도 몇 개 더 켜야 할 거야.”
“네!”
기쁜 듯 대답하고 떠나가는 아들을 보며 마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아들은 겉으로는 젊은이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지만, 속은 아직 어리기만 하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다가도 장애물이 생기면 도망치고 회피하곤 하는 것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제 외삼촌처럼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조금 늦은 저녁 식사는 아들이 최고의 스승을 만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시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아들은 많이 부족하니까, 그분의 직접 제자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그분이 가르쳐 주신 제자들에게 배울 순 있을 것이다. 지금 위에서 준비 중인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제자들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아들도 그 제자들처럼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마리아는 그런 듬직한 사람으로 성장한 아들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났다. 하지만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일 것이다. 밤에 잘 때 홀딱 벗고 자는 습관도 못 고치는 녀석이 어떻게 그런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일단은 그것부터 고치도록 해야겠다. 다 큰 녀석이 그러고 자니, 어린 여종들 보기에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튼 지금은 조금 뒤에 있을 식사를 위해 온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자리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 미래로 이어지는 자리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 사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중요한 자리를 대충 섬길 순 없다.
“자, 다들 더 열심히 준비합시다.”
“네.”
주방에 더욱 활기가 돌았다.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종이든 주인이든, 결국 모두에게 한마음으로 기쁜 일이었으니 말이다.
* * *
“자네 이름이 뭔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잠시 쉬던 베드로가 젊은이에게 질문했다. 커다란 다락방에 있는 식탁과 의자를 많은 인원이 식사하기에 알맞도록 배치하던 중에 찾아와 자신들을 도운 젊은이. 그는 여기 집주인의 아들이라고 했다.
“저는 요한이라고 합니다.”
“오, 여기 이 친구 이름도 요한인데. 허허허.”
“반가워, 어린 친구.”
등을 툭툭 치며 반가움을 표현하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
“그러면 저는 마가라고 불러주세요. 로마식 이름으로는 마가라고 쓰거든요.”
“알겠네.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 우리도 헷갈리거든. 우리 제자들 사이에도 같은 이름이 많아서, 그들을 부를 때에 따로 구분한다네. 여기 요한의 형제 이름은 야고보인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는 사람도 있어. 우리 일행의 돈주머니를 맡은 가룟 유다와 다대오라고 부르는 다른 유다도 있지. 나도 원래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이름 지어 주셔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열심당 출신 시몬과 따로 구분하는 방법을 만들어야 했을 거네.”
“열심당 출신도 있어요?”
“그럼, 우리는 세리 출신도 있고, 열심당 출신도 있지. 예수님은 차별이 없으셔.”
“와, 멋지다.”
“예수님은 진짜 대단하신 분이야. 오늘 이곳으로 온 것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니까.”
“그건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건 말이지….”
요한이 낚아채듯 먼저 대답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형님과 나를 보내시면서 성안으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메고 오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 하셨거든. 그 사람을 따라가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을 그 방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면, 자리를 깔아 놓은 큰 다락방을 보여줄 거라고 하시면서 말이야. 그 말대로 믿고 따르니까 이렇게 너희 집을 만나게 해주신 거야.”
“우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안 그래도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한번 모시고 싶다고 종종 말씀하셨거든요. 키프로스 출신인 저희 외삼촌이 예수님 말씀을 자주 하셔서, 어머니도 덩달아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커지셨어요.”
“오, 그래? 역시 예수님은 뭐든지 아시고 행동하신다니까. 지난번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우리가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전에….”
이번엔 베드로가 말을 이어갔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새끼 나귀를 타고 환영을 받으며 오신 건 알지? 그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 예수님께서 맞은편 마을에 가면 아직 아무도 타본 적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있으니 그걸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거든. 만약 누가 왜 푸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면서, 쓰고 나서 즉시 돌려보내겠다고 전하라고 하셨거든. 그 말대로 하니까 주인이 기뻐하며 내주더라고.”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으며, 마가는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졌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 어떤 가르침을 주셨고, 어떤 일들을 행하셨을까?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게 된다면 자신도 그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마가의 마음 한구석에 작은 씨로 뿌려졌다. 언젠가는 그 씨앗이 자라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마가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베드로와 바나바, 바울 같은 수많은 영적 스승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고, 단련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돌짝밭 같은 마음을 가져서 환란이 오면 금세 걸려 넘어질 마가이지만, 마음 밭의 돌들을 하나둘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좋은 땅이 되어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이 사명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곳으로 인도하신 이유 중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 * *
넓은 다락방을 따스한 등불들이 환히 밝히고 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유월절 식사에 쓰려고 미리 준비했던 누룩을 넣지 않은 빵들과 쓴 나물, 차로셋 소스, 땅콩, 아몬드, 건포도 등이 식탁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역시 미리 준비해 놓은 좋은 포도주도 식탁에 나와 있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지 않으려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내린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이 사람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치는 것이었는데, 어린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위쪽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살려주셨다. 이렇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징했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압제 속에 고통당하는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을 주시는 분임을, 그래서 그들이 언약의 백성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니산월 14일, 그 유월절을 맞이하는 식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이 유월절을 너희와 함께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나는 다시는 이것을 먹지 아니하리라.”
식사를 시작하기 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잔과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사람들에게 돌리시며 그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아직은 제자들을 비롯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이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억해 주길 바라시며 이것을 첫 번째로 말씀하셨다.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마주하시며 부드럽게 이야기를 나누셨다. 맛있는 음식과 사랑하는 사람들. 유월절의 시작이 이 이상 좋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고, 행복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러보시다가 가룟 유다의 얼굴에만 초조한 기색이 숨어 있는 것을 보셨다. 사탄이 그의 마음속에 자신을 팔 생각을 넣었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 그렇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어 한쪽에 놓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 후, 대야에 물을 담아와 제자들 앞에 앉으셨다. 그리고 따뜻한 손으로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겨 주시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주셨다. 이런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제자들 쪽이었다. 발을 씻겨 준다는 것은 종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자유를 가진 누구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행동하셨다. 그래서 처음 몇몇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저 발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고, 가룟 유다 역시 이런 예수님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발까지 씻겨 주셨고, 또 닦아 주셨다. 이제 다음 차례는 시몬 베드로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발을 내밀지 않았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게 되리라.”
따스한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정하는 수많은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말하려 했다.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러자 베드로가 급하게 대답했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이미 목욕한 자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발을 천천히 씻겨 주셨다. 그는 자신이 하늘에 오른 뒤, 남은 제자들을 이끌어 갈 중심인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다른 제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고,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많은 것이 부족하다. 가르침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도 많고, 여전히 자기 생각이 강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을 앞세우기 일쑤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에게 세 번의 배신을 허락하셨다. 그 배신에 대한 세 번의 회개가 끝나면 그는 진정한 사명을 받게 될 것이고, 이 다락방에서 임재하실 성령을 받고 나서야 자기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이다.
이 사명은 처음엔 유대인 그리고 나중엔 이방인으로 확장될 것이다. 때가 되면 아버지는 그에게 부정한 음식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그렇게 그는 보냄 받은 종으로서, 아버지와 자신의 뜻을 행하게 될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는 것과 같은 섬기는 사랑으로서 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겨 주신 후, 겉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다시 앉으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일을 너희가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아노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일이 이루어질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사람을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마 21:3, 막 11:3, 눅 22:15-16, 요 13:6-20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성경 원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평행 구절의 경우, 모든 내용이 다 포함되도록 하나로 합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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