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설정할 때, 고려하는 몇 가지 내용들이 있습니다.
1) 인물의 성별, 나이, 가족, 사는 지역, 성장 환경, 이름의 뜻, 언어 습관, 행동, 역사 배경 등
2) 인물이 어떤 질문을 한 이유
3)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을 한 이유
1번은 인물이 처한 상황을 설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자료를 축적하다 보면 등장인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윤곽이 그려지게 됩니다. 그다음엔 해당 자료들을 토대로 2번과 3번의 이유를 본격적으로 묵상하게 됩니다. 1번 자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2번과 3번의 답을 설정하기 쉬운데, 가끔은 너무 과한 설정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나온 사마리아 여인 역시 다분히 과한 설정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저는 이 여인을 통해 사마리아가 처한 역사적, 시대적, 민족적, 종교적 상황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우선 그녀가 사시라는 설정을 한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멸망한 이후 하나님과 다른 신을 함께 섬긴 문제를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이주해 온 민족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인데,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한 이후 많은 이방인이 그곳으로 와 정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자로 인한 인명피해가 계속되자 하나님을 믿기로 하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이 원래 섬기던 이방 신을 계속 섬겼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 17:33)
“그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더니 그 자자 손손이 그 열조의 행한 것을 좇아 오늘까지 그대로 하니라.”(왕하 17:41)
바로 이런 혼합주의적 신앙관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는데, 저는 그녀가 서로 다른 곳을 보는 두 눈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무시당하는 현실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다섯 명이라는 구절 역시 북이스라엘을 점령했던 민족들과의 관계를 보여드리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첫 번째 남편은 유대를 배신하고 자신들끼리 왕국을 세운 때, 두 번째 남편은 아시리아에 점령된 때(이후 메소포타미아 중심의 왕조들 포함), 세 번째 남편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점령된 때(이후의 헬레니즘 왕조들 포함), 네 번째 남편은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점령된 이후 시리아 속주에 포함된 때, 다섯 번째 남편은 이두매인인 헤롯왕 아래에서 살던 때를 의미하도록 설정해 보았습니다.
참고로 다음 편에 나오겠지만, 사마리아 여인이 함께 사는 이 남편이 아닌 남자가 하게 될 말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나오는 그리심산에서 모세의 신성한 기명(그릇)이 발견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어떤 사마리아인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으로 설정한 것은 야곱의 우물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통해, 남편 야곱의 사랑을 갈구하다가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레아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또한 이것은 과거에 그녀의 남편이 다섯이었고, 이번에도 남자와 함께 살고 있으나 그가 남편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가져온 설정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과도한 설정을 할 때면, 성경과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되기도 하는데, 현명하신 여러분들께서 잘 이해하시고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설정은 그저 설정일 뿐이니까요.
이 사마리아 여인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과 그녀가 만난 시각의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예수님과 이 여인이 만난 시각을 정오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6시라고 기록되어 있는 요한복음을 근거로 한 것인데, 유대에서 사용하는 시간대로 생각하면 6시는 곧 12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남들이 우물가에 나오지 않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온, 무시당하는 음란한 여인이라는 설정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이 부분에서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이 사용하는 시간대가 정말로 유대 시간대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시는 기록을 보면,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시간을 3시, 즉, 오전 9시라고 하는데, 요한복음은 6시에 재판을 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약 요한이 말한 6시가 유대 시간대를 적용하여 12시가 된다면, 두 내용은 완전히 상충하기 때문에 해당 부분에서 요한은 로마 시간대를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동일한 글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시간대를 사용할 이유가 없으므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 시간 역시 오전 6시나, 저녁 6시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는 이 여인과 만나기 바로 전의 사건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요한이 두 사건을 대비하여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 여인을 만난 사건이 정오에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 전부를 시간 순서대로 기록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려는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쓴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6시라고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오전 6시인지, 정오인지, 오후 6시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처음엔 유대 시간대로 쓰다가 중간에 로마 시간대로 바꿔 쓸 가능성도 없잖아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 소설에서는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정오라고 가정하여 이야기를 진행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