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온기가 작은 동굴 안에 퍼져간다. 타닥탁 낮은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이 하얀 석회암 동굴 구석구석을 비춘다. 나무 울타리가 세워진 동굴 입구에는 양들이 출입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문이 있고, 그 안쪽 한 편에는 젊고 어린 세 사람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굴 안에는 지푸라기들이 도톰하게 깔려 있는데, 한쪽 벽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짚단들이 가득 쌓여있다. 양들을 방목하러 나간 후, 누군가 깨끗하게 정리한 것처럼, 여느 마을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오물이나 쓰레기조차 하나 없다. 양들에게 여물을 주는 구유마저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여있다.
베들레헴의 양들은 모두 성전 제사를 위해 쓰인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속죄제와 속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번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화목제. 그 모든 제사들을 위해 흠 없는 양들을 길러내는 목자들의 마음가짐은 직접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이 마구간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열심이 하나하나 녹아 있는 삶의 장소였다.
동굴 안 어딘가에서 작은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동굴 구석에서 잠을 자던 아기 박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위틈에선 도마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입구에서는 바위너구리가 귀여운 얼굴을 들이밀고, 하루 종일 창공을 누비던 산새도 동굴 안에 들어와 날개를 쉬어간다. 먼 길을 걸어와 피곤할 법한 나귀도 고개를 들어 낮고 조용한 울음소리를 낸다.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빛나고, 눈앞 가득 별빛이 쏟아진다. 광야 어디에서나 부는 바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동굴 주변을 기웃거린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와 풀들도 동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 한다. 아름답고 고요한 그 밤, 세상의 모든 시선이 작은 동굴 안에 모아졌다.
* * *
“식사는 하셨어요?”
“아까 올라오면서 조금 먹었어.”
“임산부가 계시는데, 조금 먹으면 안 되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물이랑 음식 좀 가져올게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이거 고마워서 어쩌지.”
“괜찮아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소년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진다.
“정말 고마워요.”
“그나저나, 지금 몇 살인지 물어봐도 될까? 우리보다 그렇게 어려 보이지 않는데.”
“저 열네 살이요.”
“아, 그러면 아저씨 말고 형이라고 불러줘.”
“엥? 아저씨 아니었어요?”
요셉은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고, 보란 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짠.”
“아…. 형… 맞으신 거죠?”
“풋, 하하하하하. 아우, 배 아파. 콜록, 콜록. 음음…. 흐흐흐흐.”
마리아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만하다. 지금 요셉의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
“농담이에요. 형 맞으시네요. 히히.”
“그…그렇지? 나 그렇게 안 늙었어….”
“너 참 재미있는 애구나.”
“그럼요. 제가 얼마나 노력하는데요.”
“어떻게 노력해?”
“책을 많이 읽어요. 지금은 바빠서 못 가지만, 어릴 때는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있기도 했거든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한 번도 못 가보셨죠? 놀라지 마세요. 문서가 70만 개, 책이 10만 권 넘게 있어요.”
“우와. 그러면 도서관이 엄청나게 크겠구나?”
“네, 직접 보면 진짜 엄청나요. 히히. 나중에 시간 되면, 알렉산드리아에 꼭 놀러 오세요.”
“그럴게.”
“아, 내 정신 좀 봐. 얼른 가서 음식 가져올게요.”
소년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이거 참.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래도 재밌었어요.”
“응, 나도 그랬어. 하나님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인도해 주신단 말이야.”
“네, 맞아요. 아, 얼마나 웃었는지 배가 다 아프네요.”
“근데 내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여?”
“아니에요. 괜찮…. 아….”
마리아가 배를 움켜쥐었다.
“왜, 왜 그래?”
“아기가 나올 것 같아요.”
놀란 요셉은 푹신하게 깔린 지푸라기 위에 망토를 펼치고 마리아를 눕혔다. 따뜻한 물이 필요하지만, 소년이 돌아올 때까지 아내 곁을 떠날 수 없다. 요셉은 처음 겪는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진통으로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힘들어해 주는 것밖엔 없었다.
* * *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잠든 건지 온 집안이 조용하다. 덕분에 음식과 물을 가져가려는 자신의 계획은 좀 더 은밀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 명이라도 깨우면, 내일 아버지의 불호령을 들을 테니 말이다.
부엌으로 간 소년은 음식이 담긴 단지들을 하나씩 들춰보며, 두 사람에게 가져다줄 음식을 덜어내었다. 소년은 음식이 가득 담긴 제법 큰 그릇을 옆구리에 끼고, 나머지 한 손엔 비어 있는 물동이 하나를 들었다.
“어어.”
조금 들어 올려진 물동이는 이내 소년의 손에서 미끄러지며 바닥에 부딪혔다. 툭 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다행히 깨지진 않았다. 소년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물동이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낮은 목소리. 소년의 아버지다.
“아…. 그게….”
“사람이 알아듣게 똑바로 말해.”
“그러니까…. 배… 배가 고파서요.”
아버지가 소년을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소년은 당황한 듯, 어둠 속에서도 보일 정도로 얼굴이 빨개졌지만, 손에든 음식 그릇과 물동이는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쯧쯧. 그러게, 작작 돌아다녔어야지…. 그걸로 배가 차겠냐. 이것도 먹어라.”
소년의 아버지는 커다란 빵 하나를 올려주었다.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무교병.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것 그대로의 빵이다.
“고… 고맙습니다.”
“안 먹고 뭐 하냐?”
“저… 안이 답답해서요. 밖에서 먹고 올게요.”
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죄…죄송해요.”
“휴…. 그래, 자는 사람들에게 방해 될 테니. 얼른 먹고 들어오너라. 날씨가 차니, 또 돌아다니지 말고.”
“네….”
소년은 집 밖으로 나와서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년의 아버지는 가끔 소년에게 잘 해주었다. 엄청 기분이 좋을 때 잘해주기도 하고, 뭔가 힘든 일을 겪은 다음에 잘 해주기도 했다. 그에게 양심이란 게 있다면, 아까 두 사람에게 한 행동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지금 이러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식에게라도 잘 해주어야 본인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헷갈리는 태도 때문에 소년은 그에 대한 신뢰를 더욱더 잃고 있었다. 소년은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는 듯, 긴 숨을 들이쉬고는 몸을 돌려 우물 쪽으로 달려갔다.
* * *
진통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주신 심판의 말씀 그대로 산고를 겪는 마리아였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태초로부터 모든 여인이 겪은 출산의 고통. 자녀를 낳는 어느 여인도 피해 갈 수 없으니 흔하다면 흔할 수 있는 고통이다. 그러나 오랜 여행으로 지친 마리아에겐 그 고통이 더 힘들게 다가왔다. 집이었다면 어머니가 도와주셨겠지만, 지금 이 자리엔 출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요셉과 그녀만이 있을 뿐이다. 하와가 아무것도 모르고 홀로 출산을 맞이했듯이, 마리아도 홀로 그 고통에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니, 첫 여인인 하와가 그랬듯, 마리아 역시 스스로 이 고난을 이겨낼 것이다.
“응애.”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마구간에 울려 퍼졌다.
“응애, 응애.”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인간으로 태어났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났다.
“정말 고생 많았어. 몸은 괜찮아?”
눈물을 머금은 요셉이 걱정과 감사가 뒤섞인 표정으로 마리아를 보았다.
“아기는요?"
요셉은 아기를 들어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가늘게 떨리는 요셉의 손안에 아름답고 작은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정말 예쁘지?”
“네.”
“안아봐.”
마리아는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무도 그 탄생을 기뻐해 주지 않는 마을 한 편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살다가 죽기로 예정되어 있는 아기.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기름 부음을 받아 성령이 임할 때까지 아무런 기적도 없이, 사람의 아들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인간의 삶을 그대로 겪을 그는, 세상의 모든 시험을 통과할 것이고, 모든 죄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를 위해 온전히 준비되는 베들레헴의 흠 없는 어린 양들처럼, 그는 삶의 모든 순간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준비해 갈 것이다.
동굴 주위를 거니는 바람의 반주에 맞춰, 새들과 곤충들이 기쁘게 노래 불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풀들도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며 춤을 추었다. 동굴에 들어온 작은 동물들은 팔을 흔들며 환호했다. 그들이 말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본문에서 인용된 창세기 3:16과 마태복음 21:9은 개역 한글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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