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흥지인 이 지역은 수메르 이후 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파르티아 등의 나라들이 차지하며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는데, 유대인들 역시 예로부터 이 지역과 관계가 깊었다.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는 유프라테스강 하류에 있었던 수메르의 도시국가였고, 남왕국 유다가 멸망한 후 유대인들이 끌려간 신바빌로니아의 수도 또한 이 지역에 있었다. 그래서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정착촌을 건설하고 살았는데, 이들은 오랜 타지 생활로 인해 조상의 언어를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70인역 그리스어 성경이 만들어졌고, 이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이 70인역 성경으로 다시 한번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런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통해 성경을 접하게 된 이방인이 있었다. 그는 별을 관측하면서 세상의 일을 예측하는 일을 했는데, 파르티아 황실에도 정보를 전해주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 막중한 책임감은 주변 나라들의 상황을 미리 알 수 있는 어떠한 자료라도 얻고 싶어지게 만들었고,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다니엘서였다.
다니엘서에는 그가 알던 어떠한 예언보다 더 정확하게 주변 지역의 역사가 예언되어 있었다. 성경이 언제 쓰인 것인지 모르기에 과거의 기록을 무조건 신뢰할 순 없었지만, 이 예언에는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관한 내용도 들어있었다. 그것도 그냥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 파르티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로마를 암시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지금은 두 나라의 관계가 좋은 편이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줄기차게 전쟁했었으니, 언제 또다시 싸우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를 미리 안다는 것은 로마와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얻은 자료의 신빙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 예언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자신과 조국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면 자신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자신의 직업, 어쩌면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예언이 적혀있는 성경의 진실성을 탐구하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성경을 처음부터 읽어나갔다.
이 책에서는 세상의 창조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하는구나. 이 이야기를 통해 유대인의 하나님이 들려주고 싶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분석을 하면서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들도 있어서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다 아브람이라는 사람이 고향 우르를 떠났다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우르는 그가 젊은 시절까지 살았던 고향의 옛 이름이었는데, 성공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자신과 달리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을 믿고 가나안을 향해 갔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브람은 어떻게 조상이 섬기던 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을까? 비록 그가 큰 민족이 되고, 크게 이름을 떨치고, 복의 근원이 되어 땅의 모든 민족이 그로 인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이 있긴 했지만, 그때까지 하나님이 그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라도 주고 나서 그런 말을 했다면 잘 모르는 신일지라도 한 번 믿어볼까, 생각하겠지만, 아무것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근거로 믿음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아브람이 왠지 속은 것처럼 보여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의 생각 그대로 아브람은 가나안에서 수많은 고생을 했다. 기근 때문에 내려간 이집트에서는 아내를 누이라 속이기도 했고, 전쟁 통에 포로로 잡힌 조카를 구하기 위해 전투까지 한 적도 있다. 그가 가나안에서 꽤 세력을 키운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일 뿐이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계속 안 주는 하나님의 태도였다. 처음 하란을 떠날 때부터 그러더니 헤브론에서도,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난 이후에도, 멀쩡한 아들 이스마엘이 있을 때도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겠다고 말해놓고는 주지 않았다. 이 하나님이라는 신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아브람이 자신을 잘 믿게 하려면, 당장 자식을 주어도 모자랄 판에 계속 희망 고문만 하고 있다. 이건 오히려 하나님이 아브람이라는 사람을 시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해도 나를 믿을 수 있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신이 뭐가 아쉬워서 사람을 시험한단 말인가?
조금 더 읽어보자 드디어 다 늙은 그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는 장면이 있었다. 참 오래 걸렸구나 싶었는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어린 그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것 참. 준다고 약속할 때는 언제고, 다시 빼앗아 가겠다고 하다니. 하지만 가나안이라는 지역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니키아의 신이었던 몰렉에게도 수많은 갓난아이를 부모가 인신 공양으로 바쳤으니, 똑같은 가나안의 신인 하나님 역시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후에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왔다. 자식을 묶어놓고 죽이려는 그를 천사가 급하게 부르고서는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이제야 알았다고 말했다. 이 하나님이라는 신은 아까부터 왜 이러는 것일까? 왜 자꾸만 그의 믿음을 확인하지 못해서 안달일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신은 사람의 믿음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이 하나님이라는 신은 처음부터 굉장히 특이한 행동 양식을 보였다. 자신이 아는 다른 신들이 사람을 만든 것은 신을 섬기게 하고, 신전을 건축하게 하는 등의 신을 위한 이유였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라는 신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는 그들에게 세상을 다스리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복을 주면서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했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만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점도 있다. 자고로 신이라는 존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면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되건 말건, 자기가 하고자 하는 건 반드시 하는 것이 신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라는 신은 자기가 뭔가를 말해놓고도, 바로 실행하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도, 노아의 때에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도 그랬다. 이 신은 마치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는 것처럼 기다린다. 그냥 심판하고 자신을 섬기는 다른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면 될 텐데, 도대체 이 신은 왜 이러는 것일까?
이렇듯 하나님이라는 신은 다른 신들과 다른 독특한 인격성을 보였다. 이 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의 신들과 다르고, 이 지역이나 가나안의 신들과도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하나님은 신이지만,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을 꼼꼼히 읽어나가면서,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신만이 세상의 유일한 신이라고 말했다. 유대교는 일신교였던 것이다. 다신교가 대세이지만 그에게는 유일신이라는 개념도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이집트에도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있었고, 당장 그가 사는 파르티아 땅에도 조로아스터교가 있었다. 그러나 빛과 어둠, 선과 악의 투쟁을 말하는 조로아스터교와는 다르게, 유대교의 신은 그 인격성이 너무나 두드러졌다. 평소에는 한없이 선하지만, 심판할 때는 무섭게 몰아친다. 그리고 그 심판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신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었지,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신과 다른 행동 패턴을 보이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성경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갔다.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유대인의 역사를 알 수 있었고, 그들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타나서 그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유대인의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더 이해되지 않는 존재였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나 큰 의미를 두었다. 이것은 마치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마음과도 같았고,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마음과도 같았다. 하나님은 신이다. 그런데 사람들에 대해 왜 이토록 짙은 감정을 표출하는 것일까? 보통은 신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신이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자신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땐 참다가, 사람들이 악을 행하였을 때 분노한다. 자신보다 사람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유대인들의 태도 역시 잘 이해가 가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성경을 읽어보니, 유대인들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도 없고, 또 그만큼 하나님을 배신하고 실망하게 한 민족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듣고, 기적을 경험했으면서도 그들은 항상 하나님과 거리를 두었다. 자신만이 유일한 진짜 신이라 말하는 하나님을 떠나 계속 가나안의 다른 신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들은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것은 물론이고, 예루살렘 성 남단의 힌놈 골짜기란 곳에서 몰렉 신에게 자식들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까지 했다. 또 유대 왕국에 위기가 닥쳤을 때는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하나님이 보낸 진짜 예언자들을 핍박하곤 했다. 사람들 역시 그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예언자를 핍박했다. 어떻게 이런 민족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왜 하나님은 그토록 거절당하면서도, 이들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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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료의 진실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자료가 얼마나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지와 내부적으로 모순이 없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성경은 최소한의 진실성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종교에 있으니, 그 창조의 방법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유대교의 신인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또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 목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기록에 대해서는 과거 역사에 대한 정확한 자료들이 많지 않기에 알려진 시대에 대한 비교 밖에 하지 못한다. 성경에는 유대 주변 여러 나라들에 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내용이 유대인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기에 그 부분을 감안해서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확인해 보았을 때에는 일단 그렇게까지 틀린 내용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정확한 예언 때문에 도리어 진실성이 의심되는 경우는 있었다. 역시나 다니엘서였는데, 이 내용들이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과거에 한 예언처럼 쓴 것이라면 이 정도로 정확하게 기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이 남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미 말했듯 로마에 관한 내용인데, 결국 과거의 예언을 포함하여 이 예언까지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역사를 잘 살피면서 비교판단 해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시대의 징조들이 성경의 내용과 흡사해진다면, 그때에는 이것이 진실임을 믿고 황실에 전해주면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자신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지만, 성경을 읽다 보니 좀 놀랍고 재미난 구석도 있었다. 그중 한 가지는 여러 명의 저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서 살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거의 비슷한 관점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서에 따라서는 저자의 관점으로 쓰인 부분이 있기에 같은 사건에 대해서 다른 평가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내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세상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어떤 사건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든, 하나님의 허락하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일어난 일이든 하나님이 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주장이 옳든 아니든, 이것은 선과 악의 투쟁을 말하는 조로아스터교와는 조금 다른 관점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면도 신선했지만, 진짜 흥미로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저자들을 통해 쓰인 내용 사이에 공통된 한 존재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예언을 준 것은 단지 고난 중에 있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 고난을 하나님이 준 경우가 많기에 거기에는 우상을 숭배한 유대인에 대한 심판의 개념 역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다시 그들의 왕국을 건설해 주신다는 말씀 또한 하셨다. 그 왕국의 왕이 그리스도라는 존재인데, 심판 후에 구원을 준다는 점에서 완전한 회복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그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면도 존재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기도 하지만, 또한 고난을 받는 종의 모습이기도 했다. 유대인이 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성경을 통해 읽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함께 있는 존재였다. 왕이면 왕답게 잘 다스리면 될 터인데, 왕인 그리스도가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 어떤 종교에도 나오지 않는 독특한 모습의 구원자를 보면서, 그의 궁금증은 더욱더 커졌다. 그렇게 또다시 몇 개월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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