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
언제나처럼 성경에 빠져 있던 박사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는지 잔뜩 굳은 무릎관절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도 침침한 것 같고, 진짜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박사는 찌뿌듯한 몸을 풀기 위해 한껏 기지개를 켰다. 그때 또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툭툭툭, 툭툭툭, 툭툭툭툭툭툭’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둔탁하며 감정이 가득 섞인 소리였다. 얼굴을 찌푸린 박사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온 집을 시끄럽게 만든 장본인이 서 있었다. 남자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찡그린 얼굴에 잔뜩 심술이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감탱이. 이젠 귀까지 먹었나?”
헛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를 보며, 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였다.
“자네 덕분에 내 귀가 얼마나 좋은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네. 자네 손이 부러지는 소리가 저 멀리까지 들리더라고.”
막말이 난무하는 사이. 오랜 경쟁자이자, 지금은 친구라고 부를 수도 있는 존재였다. 두 사람은 워낙 의견이 달라서 젊을 때부터 무지하게 많이 싸웠는데, 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항상 반대로 해석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기간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미운 정이 들었다. 싸우고 싸우다 지쳐서 친해진 경우라 할 수 있었다. 남자는 박사가 앉아있던 의자를 자기가 먼저 차지하고는 손으로 부채질하며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좋은 포도주나 한잔 내오게. 목말라 죽겠어.”
“목마르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네.”
“난 죽어.”
“그럼 잘 됐군. 안 줄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입이 살아있는 거 보니 멀쩡하구먼.”
“그럼, 멀쩡하지.”
“워낙 소식이 없어서, 난 자네가 죽은 줄 알았거든. 뭐 살아있다니 안타깝구먼.”
“그러게 말일세. 죽었으면 못생긴 자네 얼굴 안 봐도 되고,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크크크, 자네가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할 때도 있구먼.”
남자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박사는 뭔 짓이냐며 얼굴을 찌푸렸지만, 하루 이틀 이러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신경을 끄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그나저나 정말 무슨 일 때문에 온 건가?”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네. 자네야말로 요즘 뭐 한다고 통 소식이 없는가?”
“중요한 자료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네.”
“무슨 자료? 나 몰래 꿍쳐둔 자료가 아직도 있단 말인가? 뭐야? 빨리 내놓게.”
박사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는 친구의 표정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참 단순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시간을 끌면서 놀려볼까 싶기도 했지만, 이쯤에서 말싸움을 끝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자신 나름대로 성경을 이해했지만, 자신과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 친구라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거야.”
턱을 슬쩍 움직여 가리키는 박사를 보고, 친구는 도대체 뭐냐는 표정으로 자신 앞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많이 연구했는지 작은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는 책이었다.
“응? 이게 뭔가?”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라네.”
“다니엘?”
“그래,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왕부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 때까지 재상으로 지낸 사람이지. 그 안에 로마에 관한 예언이 적혀 있어서, 요즘 그것과 관련된 책들을 확인해 보고 있었네.”
“로마에 대한 예언이라면 중요하긴 하지. 근데 그래봤자 예언 아닌가? 예언이란 본디 두루뭉술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건데.”
“물론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이 책의 예언은 좀 다르네. 지난 세월 동안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어. 내 생애 이렇게 확실하고 정확한 예언은 본 적이 없어. 그만큼 예언과 역사가 놀랍게 일치한다네.”
“아니, 뭐 과거 역사야 그럴 수도 있지. 언제 쓰인 것인지에 따라서, 예언인 것처럼 꾸밀 수도 있으니까 말일세.”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이 책을 연구한 걸세. 정확하게 말하면, 이 책뿐만이 아니라 유대인의 성경 전체를 연구한 거지만.”
“성경이면, 유대교의 경전 말인가?”
“그래, 그거 맞네.”
“아니, 겨우 유대인의 경전을 연구하자고 몇 달을 날려버린 건가? 그것도 모르고 자네를 걱정한 내가 미친놈이었구먼.”
“유대인의 경전이 어디가 어때서 그러나?”
“전에 안티고누스인가 뭔가 하는 유대의 왕자를 돕다가, 우리나라가 얼마나 피해를 보았는가? 지금은 헤롯왕이 다스린다고 하지만, 로마 속국이나 다름없는 나라의 경전을 연구하는 게 우리한테 무슨 이득이 있나?”
박사는 아무리 설득해도 친구의 고집을 꺾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고, 책상에 있던 자료를 주었다. 아무리 고집불통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 사료 앞에서는 정직한 친구인 것을 알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단순히 반대 의견만 내는 사람이었다면, 둘은 이렇게까지 친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학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양심을 상대방에게서 보았기에 둘은 서로를 인정할 수 있었다.
“됐고. 일단 가져가서 읽어보게.”
“읽어서 뭐 하냐니깐?”
“자네, 나에 대해서 모르는가? 내가 아무 의미 없는 자료를 가지고 몇 달이나 낭비할 사람인가?”
불같이 화를 내려던 친구가 입을 다물었다.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진실을 탐구하자는 것이 우리의 맹세였네. 그것이 학자로서 우리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아무 말 말고 자네가 직접 보고 판단하게.”
친구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럴 땐 억지로 안겨주면, 못 이기는 척 하면서 받아 가면서 좋아할 것을 알기에 박사는 다니엘서를 돌돌 말아 친구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렇게 친구는 떠밀리듯 박사의 집을 떠나갔다. 그는 이미 충분히 성경을 연구했기에 이제 남은 것은 친구의 의견뿐이었다.
* * *
어떻게 이런 좋은 걸 그냥 줄 수 있지? 저 친구는 화난 척 하면, 언제나 이렇게 자료를 던져준단 말이야. 숨겨둔 자료가 많은 것은 오히려 자신 쪽인데 말이다. 하하하.
박사의 예상대로 다니엘서를 가져가는 친구의 입은 째지듯 벌어져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자료를 얻는다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특히 그것이 친구에게서 공짜로 얻어낸 것이라면 더욱더 그랬다. 그러나 이런 기분이 항상 좋은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자료들이 넘치도록 많아서, 옥석을 분별하다가 짜증이 나서 던져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특히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민족의 자료일 때에는 짜증을 넘어 화가 폭발하기도 했으니, 그런 의미에선 이번 도전도 어쩌면 나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자료를 준 친구가 이렇게까지 읽어보라고 하는 것이라면, 시간 낭비는 아닐 거란 확신은 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지만, 사실 예전부터 친구가 낸 의견에 진심으로 동조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면 티를 내기 싫어 일부러 반대 의견을 더 주장했지만, 속으로는 감탄을 연발하곤 했었다. 그런 친구가 자신을 인정해 주는 현실이 그를 더욱더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집에 도착하자, 책을 한 곳에 놔두고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요한 문서일수록 감정이 요동칠 때는 읽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고, 처음 접하는 내용인 경우에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늦은 밤에 보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간단하게 주변을 산책하며 기분을 가라앉힌 다음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어두운 연구실 중앙에는 커다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옥상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있었다. 옥상에는 별을 관측할 수 있는 장비들이 여럿 갖춰져 있었는데, 실제로는 필요하지 않은 장비들도 몇 가지 있었다. 지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상 누가 좋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를 해서라도 다 사놓았던 것이다.
등잔불을 켜니 넓은 탁자 위 일부분에 밝은 빛이 비쳤다. 그가 책을 읽을 공간이 바로 그곳이었다. 집중력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참 많은 것이 그의 문제긴 했지만, 그래도 그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도 이런 습관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을 믿고 이번에도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고, 친구가 놀랄만한 새로운 의견을 찾아내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다니엘서에는 친구가 했던 말처럼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정확성으로 지난 몇백 년 동안의 일들이 예언되어 있었다. 그 역시 친구처럼 다니엘서에 기록된 예언들을 읽고 놀랐는데, 친구보다 좀 더 단순한 성격상 그 크기는 더욱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문제에 대해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적이 많아서, 친구에게 놀라움을 주곤 했지만, 이런 사실적인 사료에 더 쉽게 빠져드는 것이 그라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런 일이 정말 가능한 거야?
몇몇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놀랍도록 정확하게 지난 역사와 일치하는 예언에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아 왔던 예언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예언이거나, 한두 가지 사건에 대한 예언이었다. 그런 예언이라면 그가 수집한 자료들에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이 예언은 그런 예언들과 달리 매우 정확했고, 몇 가지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에 대해 차례대로 예언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근동지역에서 명멸했던 여러 나라들의 역사를 모두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밤이 늦도록 다니엘서를 읽고 또 읽은 그는, 친구가 연구했다던 나머지 성경도 읽고 싶어졌다. 이 자료만으로는 진실성을 분별할 수가 없다. 자신보다 더 많은 자료를 가진 친구라면,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혼자만 알게 둘 수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어느덧 창밖에는 어둠이 가고, 새벽녘의 어스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밤을 새웠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도 또렷했다. 이런 상태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친구에게로 가서 나머지 책들을 뺏어, 아니 빌려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왠지 지는 것 같은 기분에 일부러 늦은 오후에 가고자 마음을 먹는 그였다. 이 남자는 사실 친구가 별로 없었다.
오디오북으로 들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