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에서 나온 야이로의 모습이 상당히 특이하다고 느껴지실 것입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설정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회당장의 지위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확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장은 장로들(보통은 지방 공회원인 바리새인들) 중에서 1년마다 투표로 선출되는 방식으로 뽑혔는데, 한 명의 회당장만 있던 곳도 있고 몇 명이 회당장으로 있던 곳도 있습니다.
특히 가버나움의 이 회당은 당시 갈릴리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야이로가 이런 회당의 회당장으로 있는 이상,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이유로 눈치를 많이 봐야 했을 것입니다. 다른 장로들에게 밉보이면 그의 회당장 경력도 끝이 날 테니까요.
더불어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시각이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는 몇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중풍 병자의 사건이 그 대표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거라사 지방의 도시, 가다라의 귀신 들린 사람이 치유 받는 사건과 선후관계가 분명하진 않지만,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생겼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아무리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는 발언은 굉장히 심각한 신성모독에 가까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새인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딸을 고쳐 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저 정도 지위까지 오른 사람이, 자신이 얻은 모든 경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는 행동을 하기란 너무나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야이로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설정을 한 이유를 하나 더 말씀드리면, 그의 거주지가 다른 곳이 아닌 가버나움이라는 데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난 이후로 거주하신 곳이고, 회당의 바로 앞 동네에 베드로 장모의 집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집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사실로 추측해 본다면, 야이로의 딸이 어떤 이유로 죽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닌 이상,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예수님이 계심에도 가지 않은 것은 야이로의 선택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 그는 딸이 죽었다(마 9:18)고 말하고, 마가·누가복음에서는 딸이 죽어가고 있다(막 5:23, 눅 8:42)고 말하는데, 두 발언의 의미 차이와 복음서의 사건 전개 과정으로 인해서, 마가·누가복음의 야이로의 발언은 혈루증 여인 사건의 앞(원래의 순서)에 배치하였고, 마태복음의 발언은 뒤쪽(원래는 혈루증 여인의 앞쪽)에 배치하여 그의 내면적인 변화를 나타내도록 표현해 보았습니다.
이런 이유를 종합하여 오늘의 야이로의 모습을 설정해 보았습니다. 물론 언제나처럼 이것을 믿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저 역시 이런 내용을 믿으면서 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알려진 당시 정황들을 바탕으로, 성경의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으니,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감동과 감사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야이로의 이야기가 특별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아마도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눈치를 보다가,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린 제 모습이 야이로와 겹쳐져서가 아닐까 합니다. 정말 회개는 하늘나라에 가기 전까지 끝없이 해야 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