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화가 난 사람들이 절벽 끝에 서 있는 예수님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요즘 갈릴리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이름이 있다. ‘예수’. 그래, 나사렛의 회당장인 자신이 잠시 가르쳤던 바로 그 아이의 이름이다. 그가 어릴 적부터 워낙 똑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서 나중에 뭔가를 해도 할 줄 알았는데, 역시 자신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한때는 그를 자신과 같은 바리새인으로 만들어 훌륭한 교사나 회당의 장로, 나아가 회당장까지 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바리새인이 되는 것을 권유했었는데, 그는 그 길이 아닌 아버지의 일을 선택했다. 그의 아버지가 목수이니, 목수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그러기엔 그 아이의 재능이 너무나 탁월했었다. 이런 이유로 자신이 마리아를 찾아가 진로를 바꾸게 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조언했었는데, 마리아는 단칼에 거절하며 말했다.

 “그 아이를 믿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두세요. 그 아이 혼자서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확고한 그녀의 태도에 결국 포기하고 아까운 인재를 놓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확실히 드러날 사람은 어떻게 해도 드러나는 것 같다. 이 역시 하나님의 뜻이겠지? 한창 혈기 왕성하던 시절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일이 어디까지일까 하고 고민한 적이 있는데, 이런 일을 경험하고 나면 사람 계획의 덧없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것을 위한 사람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은 항상 그 이상의 무언가를 준비하시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그렇게 본다면 예수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일 것이다. 자신은 아켈라오가 쫓겨나고, 열심당이 반란을 일으키던 시절에 가버나움을 떠나 이곳 나사렛에 들어왔다. 워낙 살벌하던 시기였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주변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나사렛은 산 위에 있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했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은 이곳으로 도망 와서 지금까지 평생을 살게 되었다. 

 처음엔 땅을 구입해서 농사를 지었는데, 자신이 바리새인이고 교육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자신이 회당의 장로, 그리고 회당장이 되길 원했다. 그렇게 이곳 나사렛의 회당을 맡은 지가 이미 25년 가까이 되었다. 보통 회당장은 1년마다 투표를 통해 선출되는데, 이곳은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 없어서 거의 종신직 비슷하게 회당장직을 맡고 있는 중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좀 작은 회당이라 할지라도 정말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가버나움에서 함께 공부했던 야이로는 큰 회당의 회당장이 되었는데, 거긴 워낙 경쟁이 심해서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계속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니, 얼마나 힘이 들까?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쉬쉬해야 하고, 가족들이 병에 걸려도 드러내놓고 의사를 찾아다니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행동들이 뭐가 문제겠냐마는 그런 것을 가지고 이래저래 판단해 대는 사람들이 많으니 어쩌겠는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못 믿었으면 그렇게 병이 걸릴까 하고 말하는 사람들 곁에서는, 자신이라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사렛의 회당은 모두가 자신의 말을 믿고 따르니, 눈치 볼 일도 없고 좋다.

 원래 이곳은 별다른 회당 건물도 없었던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다 자신이 오던 시기를 즈음하여 많은 사람이 나사렛으로 이주해 오면서 정식으로 회당 건물이 생기고, 마을의 분위기도 활발해졌다. 나이 든 사람들은 가끔 예전이 더 살기 좋았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신은 그 시절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 굳이 궁금하지도 않고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 시절을 겪으며 발견한 가장 큰 보석이 예수이다. 자신이 가르친 수많은 아이 중에서도 유난히 빛나던 아이. 사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가르친 기간은 상당히 짧고, 또 가르치기 전에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던 아이긴 했다. 특히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라고 단언하듯 말할 땐 자신조차 놀랄만한 해석을 많이 했었다. 가끔은 그런 행동이 너무 과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자신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는데, 당시엔 좀 기분이 나빠서 한 마디 해주긴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의 의견도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라 내심 미안해지기도 했었다. 이런 대단한 아이였으니, 아버지를 따라 목수를 하겠다고 했을 땐 화가 많이 났었다. 또한 그런 길을 가게 만든 아버지 요셉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자식에게 목수의 길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아버지라니 진짜 최악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 미움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자신이 이미 요셉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경험해 오고 있는데 어떻게 계속 미워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이름뿐 아니라, 성격까지도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품이 부드럽고, 화를 잘 내지 않았으며, 자신이 맡은 일이 크든 작든 항상 성실했다. 이런 성품이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율법으로 누군가를 판단할 때의 모습 때문에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껴졌었다. 

 그는 율법을 굉장히 잘 지키는 사람이었는데, 보통 이런 성향의 사람은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할 때 율법에 적혀있는 그대로를 행하곤 한다. 하지만 요셉은 누군가가 율법을 어겼을 때, 심판보다는 용서를 택하려고 했다. 바로 이 점이 형들을 용서한 창세기의 요셉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었는데, 이것보다 더 결정적인 게 있었다. 그것은 그의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꿈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대충 들으니 아내 마리아와 결혼한 것도 꿈을 통해 인도받은 것이고, 헤롯왕 시절 이집트로 떠났다가 돌아온 것도 다 꿈으로 인한 것이라고 했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예수는 혈통으로는 유다의 후손인데, 이름으론 요셉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남왕국 유다는 유다의 후손이 왕이 된 나라이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요셉의 후손이 왕이 된 나라였으니, 어찌 보면 예수는 두 왕국을 모두 아우르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기 시절에 이집트에서 돌아온 것도 그렇고, 그의 이름이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여호수아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도 그렇고, 유난히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과 겹치는 그의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특별하게 사용하시려고 이런 남다른 인생 여정을 겪게 하신 것일까?


*  *  *


 “회당장님.”

 “오, 야고보 아닌가? 예수가 돌아왔다며?”

 “네, 어젯밤에 집에 왔습니다.”

 “어때, 예전과 뭐가 달라 보이던가? 그가 회당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는 것이야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되지만,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마저 들리더라고. 가나에 있던 그에게 왕의 신하가 찾아가 아들을 고쳐 달라고 했던 이야기 말일세.”

 “저도 그 소문을 듣고 형님께 물어봤지만, 그것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하네요.”

 “그 아이는 예전부터 필요한 말만 하곤 했으니, 실제로 아이를 고치고도 숨기는 것일 수 있네.”

 “가족에게는 안 그래도 될 텐데….”

 “뭐, 그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아참, 제자들도 많다고 하던데, 같이 오진 않았나?”

 “제자들이 있다곤 하는데, 일단 그들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혼자 왔다고 하네요.”

 “그들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닌데, 그 궁금증은 다음에 풀어야 하겠군. 아무튼 내일 회당에 꼭 들르라고 전하게. 안식일 예배 중에 그에게 한 가지 순서를 맡겨야겠네.”

 “알겠습니다. 예배 때 뵙겠습니다.”

 “그래.”

 예배 중에 그에게 성경 낭독과 해석을 시켜볼 예정이다. 그는 자신에게 배운 이후로 어떤 지식을 쌓았을까? 그리고 그 지식들로 인해 어떤 성경 해석을 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여러 회당에서 무슨 말을 하기에 사람들이 놀라는 것일까? 내일 예배 때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말로만 듣던 기적도 볼 수 있지 않을까?


*  *  *


 안식일이 되자,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들었다. 회당장은 회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오래지 않아 그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총명하고, 홀로 빛나는 그의 모습. 역시 자신이 제자 하나는 잘 기른 것 같다.

 예배가 시작되었다. 예배 순서는 평소와 같았다. 다 함께 쉐마를 암송하고, 다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제 성경을 읽을 차례가 되었는데, 이미 상황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예수에게로 몰렸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당 가운데 있는 목조 연단에 올랐다. 그리고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읽기 시작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는 여기까지 읽은 후,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앉았다. 회당 안은 조용해졌다. 한창 이름을 날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어떤 가르침을 줄까?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드디어 시작된 그의 강론. 그는 이 말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성경 해석을 전해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고, 감탄하며 옆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자신들과 함께 자랐던 그가 저런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는 생각에 놀라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누군가는 순수하게 감탄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저 사람은 목수일 뿐인데 우리가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하면서 속으로 비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에서도 행하라’ 할 것이다.”

 순간 훈훈하던 회당 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경직되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뿐이었느니라.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회당 안의 사람들은 갑자기 비판적으로 변한 그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들을 비난했다. 좀 잘나간다 싶으니, 자신들이 우습게 보이는 것인가? 오히려 우스운 사람은 그이다. 기껏해야 목수밖에 안 되는 주제에, 무슨 말씀을 전하고, 해석을 한단 말인가.

 회당장의 마음속에선 예전에 자신을 화나게 했던 순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 그는 마치 자신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안다는 듯이 말했다. 당시엔 그저 아이일 뿐이었으니 뭘 모르고 하는 말이라 생각해서 한마디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 큰 지금도 저런 소리를 하다니. 저딴 소리를 해대는데 사람들이 높인다고? 말도 안 된다. 저대로 놔두면 사람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열심당이 나올지도 모른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잔뜩 화가 났다. 각자 화가 난 이유는 달랐지만, 그에게 분노하고, 그를 가만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지배한 것은 똑같았다. 그들의 눈엔 중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예수의 형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난감해하는 그들 역시 자신들의 친구요, 가까운 누군가의 자식들이지만, 분노에 이성이 마비된 그들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의 팔을 붙잡고, 욕을 하며, 근처 산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 그의 동생들이 아무리 말려도, 그들은 행동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말려야 할 회당장까지 그들과 함께 화를 내고 있으니, 하나님의 뜻도 자신들과 같을 것이라고, 그들은 스스로의 분노를 정당화했다. 그들의 앞 저 멀리에 경사가 가파르고 하얀 돌들이 여기저기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는 산이 보였다.


*  *  *


 벼랑 끝. 위태롭게 보이는 그곳에 예수가 서 있다. 사람들에 밀려 벼랑에 선 그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뒤로 돌아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곧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아닌, 슬픔 가득한 눈동자로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

 회당장은 그 깊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은 안식일이다. 자신은 안식일에 한 번에 걸어서는 안 되는 천 보 이상을 멈추지 않고 걸어와 이곳에 이르렀고, 안식일에 더 해선 안 되는 살인을 하려 하고 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

 회당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안식일에 감히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벼랑 끝에 멈춰 선 그를 밀어버리려고 다가가던 사람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이제야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전쟁이 나도 안식일엔 싸우지 않으려 했다. 안식일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 때문에 독립전쟁 시기에는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목숨을 잃으면서도 결코 반항조차 하지 않던 그들. 나중엔 안식일이라도 공격을 방어하는 정도는 괜찮다는 해석이 내려져 상황이 나아졌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히 강했다. 그런데 이들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한 율법을 어기려고 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회당장이 말했다.

 “예수는 어서 이곳을 떠나거라.”

 그는 회당장의 눈을 한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사람들의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떠나가는 예수의 뒷모습을 보는 회당장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죽이고자 할 정도의 내용은 아니었다. 자신들은 도대체 왜 이성을 잃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을까? 그에 대한 너무 큰 기대가, 오히려 배신감으로 돌변한 것인가? 예수의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자신조차 그들과 행동을 함께하려 했었다. 오늘이 안식일인 것도 잊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어기려 했다. 분노로 인해 바리새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율법 조항들을 어겼다. 이런 자신이 회당장이라니….

 회당장은 스스로의 행동이 너무나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회당장의 기분을 모두가 느끼는 듯, 마을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살았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온 세상에 선포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이야기에서 인용된 마태복음 4:15-17, 마가복음 1:15, 누가복음 4:18-27절은 개역한글을 기반으로 성경 원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오디오북으로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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