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구원과 관련되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내용이 예수님께 구원의 주권이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구원은 사람의 어떤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구원의 필요조건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한 구원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받을 수 있는 것이고(엡 2:8), 선한 행위는 믿는 자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열매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행함에 대해 가장 강조하는 것이 야고보서의 말씀인데, 이 야고보서의 말씀으로 믿음과 행함의 상호관계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약 1:22-25, 새번역)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개역한글)
이 말씀만 두고 생각해 보면, 마치 행함이 구원의 필수조건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야고보가 하는 말은 율법을 완전히 행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행함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행함이 있다고 다 믿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행함이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하나도 없는 믿음이 과연 제대로 된 믿음이냐고 반문하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뒤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개역한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개역한글)
행함으로 완전하게 되는 믿음, 행함으로 살게 되는 믿음. 그는 이러한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함이 없는 사람은 과연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혀 무관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믿는 분이 과연 성경에 나오신 그 예수님이 맞는 것인가 하고, 그 진정성을 의심해 볼 순 있겠지만, 행함이 부족하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또다시 율법의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행함을 완벽히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 5:29-30, 새번역)
이것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실 수 있는 분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정말 그렇게 하길 바라시면서 저 말씀을 주셨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산상수훈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원래 기준은 이것이라고 말씀하심과 동시에, 사람의 힘으로는 그것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개역한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요 6:37-40, 새번역)
이 말씀은 로마서의 말씀과도 이어지는데,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0-26, 개역한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행함으로 믿음을 완성시켜야 한다. 행함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는 자라면 행함 또한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거창한 행함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한 강도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그가 믿기로 작정한 이후 어떠한 행함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단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구원에 있어서 모든 행함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른 행함이 하나라도 있으면, 예수님은 그것으로도 그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주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있으니까요. 때문에 어떤 대단한 적용을 하려 하기보단, 작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행함을 하는 것이 좋은 적용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렇듯 행함이 부족해서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는 믿음은 못 되고, 겨우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연약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영접한 분이 성경을 통해 알려주신 그 예수님이 맞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충분히 구원해 주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마 9:6, 막 2:10, 눅 5:24)